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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다 Sep 26. 2020

완도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런 장소가 하나쯤 있다.

“어디? 완도? 거기 바다 아니니? 우리 아들 육군 아니었어?”    

 

육군훈련소에서 신병 교육을 마치고 자대에 도착한 첫날 부모님에게 전화할 수 있었다. 입대 후 처음 하는 통화였다. 전남 완도의 해안 소초에서 생활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자 어머니는 잘 지냈느냐는 안부 대신 완도가 대체 어디 있는 곳인지를 먼저 물었다.      


바다에서 군 복무하게 될 것으로 가족 누구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육군을 지원했으니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지 않는다면 내륙 산간 어딘가에서 2년여 시간을 보낼 것이었다. 뜬금없이 바다라니.     

 

아무 연고도 없는 완도에서 나는 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낸 2년 2개월의 시간 대부분은 바다가 차지했다.      


나는 바다 끝자락에 있는 절벽 위 소초에 상주하며 남해 일대를 레이더 장비로 감시했는데, 늘 바다를 보는 게 일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의 해상 침투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으며, 수상한 선박을 발견하면 해군·해양경찰에 해상검문을 요청하거나 항·포구 인근 육군 부대에 보고해 5분 대기조를 출동시켰다. 아울러 바닷길을 다니는 화물선과 인근 섬을 오가는 여객선의 이동을 살피면서, 크고 작은 어선들의 움직임에 문제가 없는지 지켜보는 것도 임무였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행복인가 싶어 즐거웠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도시 촌놈에게 바다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기상 소리에 눈을 떠 창문을 열면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가 인사를 건넸고, 어두컴컴한 밤에는 저 멀리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 행렬에 밤바다의 풍경을 감탄했다.  


“역시 바다는 아름다운 곳이었어.”     


하지만 바다와의 행복한 동거는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바다의 낯선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날씨와 낯선 환경이 문제였는데, 늘 긴장을 갖게 했다.     


습하고 염분이 많아 빨래가 잘 마르지 않았고, 걸핏하면 나타나는 짙은 해무에 바로 눈앞의 물체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벌레와 모기는 왜 그렇게 많은지 조금만 방심하면 온몸이 물린 자국 투성이 됐다.     


비가 오면 폭우가 되어 내렸고, 바람이 불면 강풍으로 변해 몰아쳤다. 장마에는 눅눅함과 끈적거림이 일상이었으며, 태풍예보는 비상상황의 시작이었다. 한여름 바다에 내리 꽂히는 번개는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이었고, 한겨울 칼바람은 살을 에는 듯했다.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다는 다시 잔잔하고 고요했으며 평화로웠다.     


나는 바다의 사계절을 두 번씩 겪은 뒤 전역했다. 다시는 바다를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다짐했다. 바다라면 고개를 저었다. 바다는 무서운 것이었고, 완도는 잊어야 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내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여름이면 가족·친구들과 바다를 찾아 물놀이와 서핑, 낚시를 즐겼고, 겨울에는 눈 내리는 바다의 낭만을 연인과 함께 가졌다. 다시 찾은 바다에서 소중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완도는 떠오르진 않았다.      


‘왜 그렇게 완도 바다가 싫었을까?’     


그렇다고 나의 군생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 군시절은 유익했다. 시키는 것 열심히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는 평범한 병사였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과를 소화하며 2년이 넘는 시간을 무사히 보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병사들이 마찬가지. 꼭 무엇을 이루지 않더라도 오롯이 그 시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칭찬받을 일이며 스무 살은 성장한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전역 후 나는 무슨 일을 할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해답을 찾진 못했다. 폐쇄적인 낯선 환경에 새로 적응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전우들의 인생을 탐구하며, 꾸준히 수많은 책을 읽고 생각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어학시험을 준비하진 않았지만, 부단히 인생을 고민했던 노력을 후회하진 않는다.


완도군 정도리 구계등. 일몰이 예쁜 몽돌해변으로 날씨가 좋으면 청산도, 대모도, 소안도, 보길도 등이 한 눈에 펼쳐진다.
완도군 신지면 동고리 해변. 외지인의 발길이 적은 한적한 해변이다.
완도군 고금면과 장흥군을 잇는 고금대교. 완도와 주변 섬들은 서로서로 또 육지와 연결돼 있다.


완도를 한 번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잊고 지내던 군 복무 시절이 문득 생각났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 그때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세월이 흘러 주변을 돌아보니 바다보다 더한 무서운 세상에 나는 홀로 남겨져 있었다.      


바다가 건넨 두려움의 감정은 지금의 버티는 삶을 유지하는데 주춧돌이었는지 모른다.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 잊고 지냈던 기억을 더 늦기 전에 끄집어내야 했다.     


완도는 서울에서 자동차로 여섯 시간은 걸린다. 큰 마음을 먹고 차에 올랐다. 이른 새벽 출발한 나는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완도에 도착했다. 내가 근무했던 해안 소초를 가기 위해서는 사유지 도로를 통과해야 하는데 허가 없이는 출입이 어려웠다.


어차피 소초에는 민간인이 들어갈 수 없을 것이었고, 코로나19 시기에 서로에게 민폐가 되지 않고자 아예 차에서 내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름 언택트 여행이랄까.


해안 소초 인근 해안에 차를 멈췄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여전히 그대로다. 군시절 늘 지켜봤던 익숙한 섬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물결과 출렁이는 파도, 라디오를 틀어놓고 조업 중인 어선이며, 갓 출항한 여객선의 항해도 그때와 같다. 허무함, 허탈함, 아쉬움, 안타까움.      


긴 시간 멍하니 바다를 바라봤다. 잊힌 줄 알았는데 오래전 모습들이 하나둘 생생하게 떠올랐다. 흐트러진 퍼즐을 맞추듯 조심스럽게 단편의 잔상들을 이어 붙였다. 바다를 겁내며 두려워했던 어린 내가 눈에 보였다. 그때에는 희미했던 감정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선명해졌다.     


완도에 한 번 가봐야지.


긴 시간 마음 속에 품었던 생각을 드디어 꺼낸 시간. 무엇을 얻고자 함은 아니었다. 마음이 편안해질 일도 아니었다. 단지 군 생활을 보낸 도시라는 특별함 때문일까. 혹은 미래를 그렸던 스무 살의 날들이 그곳에 있어서일까.


완도에 언제 다시 올지는 모를 일이다. 다음 계절에 또 한번 찾게 될 수도 있고, 다시 십 년의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앞으로 살면서 한 번도 못 오게 될 수도 있다.


좋았거나, 좋지 않았거나 잊을 수 없는 감정은 분명 그곳에 있다. 누구나 가슴 속 하나쯤 품고 있는 그런 장소. 어느 쪽이든 또 무엇이든 상관없다. 완도에 오니, 그냥... 좋았다. 그걸로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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