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갑자기, 제주

by 레이다

갑자기, 제주



*

‘뭐하냐’

‘뭐하긴회사지 일한다’

민재와의 메신저 대화는 짧다. 카카오톡 대화창에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없는 이유도 있지만, 딱 할 말만 하면 되는 남자들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내용도 없다. 분명 저녁에 야근하지 않으면 술 마시자는 내용일 것이다.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카톡 대화임에도 민재는 또박또박 띄어쓰기를 다하는 편이다. 사람을 주로 상대하는 일이라 그런지 정확한 문장으로 보낸다. 사람 참 빡빡하네. 난 그냥 붙여 쓰는데.


‘무슨선물? 나한테잘못한거있냐?’

‘진짜 대박 선물이야 비행기 티켓!’


그러면서 민재는 내게 휴대전화로 찍은 비행기 e-티켓 사진을 함께 보냈다.

‘이게뭐야’

‘사연이 길어. 일단 이따가 저녁에 뭐 없지? 맥주 한잔 콜?’


그럼 그렇지. 역시나 술 마시자는 이야기였냐고 잔소리하면서도 동네 치킨집에서 보자고 했다. 민재와 나는 버스로 한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어서 종종 저녁 시간에 만나곤 한다.

‘술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암튼 이따봐’

나는 PC버전의 메신저 창을 닫으며 다시 일을 시작한다. 2월 초순인 요즘은 우리 부서가 가장 바쁜 시기다. 회계 결산 기간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회계 처리에 대해 결산하고 보고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이제 어느. 정도 끝나가고 있다. 다음 주가 구정이다 보니 아마도 그전에 결산을 마무리 짓고 연휴 때에는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틈틈이 온라인 여행 사이트를 들락거리고 있다. 땡처리 특가로 나온 항공권이 없는지 말이다. 어차피 연휴에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부모님 집에 가자니 어서 결혼하라는 성화를 들을게 빤해 여행을 가려는 계획이다.


민재가 보내준 티켓 사진을 다시 봤다. 연휴 첫날 김포에서 출발해 제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이다. '이거 제수씨 이름의 티켓인데.' 아이가 없는 유부남 민재는 설 연휴에 자유를 얻었다며 기뻐했었다. 와이프와 장모님을 제주 여행 보내드리고 자신은 집에서 혼자 쉴 수 있게 됐다고 했었다. 하지만 뭔가 일이 꼬였음이 분명하다.



*

“늦지 말라니깐 또 늦었어, 치킨 네가 사.”

“아, 이 새끼. 너 내 얘기 들으면 네가 사게 될 거야. 내가 불쌍해서 아마 2차까지 사게 될 거다.”

20분이나 늦어 놓고 능청이다. 최소 2차를 가겠다는 이야기. 저러면 둘 중 하나다. 엄청 좋은 일이 있거나, 아니면 엄청 좋지 못하거나.

“제수씨한테 허락은 받고 나온 거야?”

“당연하지. 오늘 와이프도 친구들하고 약속 있어서 괜찮아.”


와이프 약속 있다는 말과 함께 내보이는 민재의 웃음이 해맑다. 민재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맥주를 주문한다.

“참이슬도 한 병 주세요.”

“소주는 뭐 하게, 섞으려고?”


민재에게는 규칙이 있다. 가볍게 할 때는 맥주, 고민이 있을 땐 소맥이다. 소주로만 달릴 때는 좋지 않은 일이 있는 날이다. 그럴 땐 빨리 취해야 하니까.

“이제 얘기해 봐. 뜸 들이지 말고.”

“너 이번 연휴에 제주도 다녀와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 외국 나갈 거야.”

“외국 나가면 뭐 해. 우리나라가 좋지. 내가 비행기 티켓 줄 테니까 제주도 다녀와.”

민재는 중국에 사는 처형 내외가 연휴에 맞춰서 한국에 온다고 했다. 그래서 장모님이 제주도는 민재와 제수씨 둘이 다녀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순간에 자유가 사라지게 되었다며 한숨을 내쉬더니, 마침 아르바이트생이 가져온 맥주를 들이켰다. 절반 정도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는다.


“크흐, 소주 안 탔다.”


민재는 맥주의 탄산 때문인지 아니면 소주를 타지 않은 아쉬움 때문인지 인상을 찌푸리며 숨을 내뱉는다. 그러면서 소주를 소주잔에 한 잔 가득 따라 자신의 맥주잔에 넣었다. 그러더니 똑같이 한 잔 더 따라서 내 잔에도 넣는다.


“이건 좀 아니지 않냐? 아니 처형네는 왜 갑자기 오는 거냐고.”

“설이니까 오는 거지, 그래서 제수씨랑 둘이 제주도 가기로 한 거야?”

아마 아닐 거다. 그랬으면 그 티켓을 나한테 준다고 하지 않았을 테다.

“아니, 와이프도 언니 보겠다고 그러는 거야.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인데 어딜 가느냐고.”

“그래서?”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티켓, 환불도 안 되고 버리기 아까우니까 나는 그냥 너랑 둘이 제주도 다녀오겠다고 했지.”

“미친놈. 퍽이나 그러라고 했겠다.”

“말이라도 꺼내 보는 거지.”


민재는 특가로 구매한 탓에 취소나 환불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티켓을 내게 주려는 것이었다.

“그럼 다른 한 장은?”

“그건 와이프가 처리하기로 했어. 각자 한 장씩 다른 사람에게 팔든지 친구한테 주든 처리하는 걸로.”


내 연휴 계획에 제주는 없었다.


“딴생각하지 말고 제주도 다녀와. 얼마나 좋아? 공짜로 생긴 티켓인데. 항공사에 물어봤는데 환불은 안 된다고 해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탑승자는 바꿔주겠다더라.”

그래서 티켓을 얼마에 팔 거냐고 물었다. 민재는 친구 사이에 돈 거래 하는 것 아니라며, 팔려고 얘기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냥 재밌게 잘 다녀와.”

“지랄하네. 갖고 싶은 건?”


민재가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며 웃는다.

“면세점에서 담배나 사다 줘.”

“그거면 돼?”


“그리고 오늘 술.”

“이거 내가 살짝 손해 보는 기분이다. 담배사고 술사면 그게 그거지.”

내가 웃으면서 민재를 쏘아붙이자 2차는 자신이 사겠다며 오늘 늦게까지 같이 있어 달라고 슬픈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담배 사 오라고 했다는 것은 비밀로 해달라고 덧붙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민재에게는 나 말고 딱히 티켓을 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제주라. 생각에 없던 일정은 설렘보다 걱정을 먼저 들게 한다. 그렇다고 계획대로 이어지는 여행이 온전히 만족스러울 수도 없다. 우연히 찾아온 여행, 갑자기 가게 된 제주는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

설 연휴 첫날의 김포공항에 사람이 이렇게 많을 것으로는 생각 못 했다. 하긴, 놀러 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비행기 타고 고향에 가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조금 일찍 도착해 티켓을 발권하고 여유 있게 커피나 한잔하려고 했는데, 엄청난 대기 줄 덕분에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커피는커녕 조금 늦었으면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수씨한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했지만, 민재는 와이프가 외출 준비로 전화 못 받는 상황이라며, 연휴 지나 같이 보자고 한다. 그러면서 민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게 한 마디 건넸다.

“그 티켓, 두 장 중에 다른 한 장은 와이프가 자기 친구한테 줬다더라.”

나는 뭘 그런 것까지 다 이야기하느냐며 알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마침 계류장 게이트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있다. 나 역시 전화 통화를 하면서 한 손에 가방을 들고 대열에 동참했다. 슬슬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민재는 내 대답이 아쉬웠는지 한 마디 덧붙였다.


“우연히라도 만나면 좋겠다. 와이프 친구도 싱글이야.”

“됐어. 나 그냥 혼자가 좋아.”

“언제까지 혼자 지낼 거야? 전화번호 알려줄까?”

나는 웃으며 "빨리 끊어"라고 닦달했다. 이제 곧 내가 티켓을 승무원에게 보여줘야 했다. 민재는 다급한 목소리로 잠깐만을 외친다. 전화를 끊을 수 없어서 내 뒤에 서 있는 여자에게 살짝 고개 숙여 먼저 지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긴 생머리에 가방을 메고 있던 여자는 무슨 상황인지 알았다는 듯 내게 웃어 보이며 지나간다. 난 맨 뒤로 가며 민재에게 어서 이야기하라고 대화를 이었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계속됐다.

“도착하면 숙소에만 있지 말고 돌아다녀. 알았지?”

“알았으니까 끊어. 연휴 잘 보내고, 아니 수고하고.”

내 자리는 뒤쪽이다. 맨 뒤에서 세 번째 복도석. 좌우 3열로 구성된 비행기는 그리 크지 않다. 옆자리는 아직 탑승을 안 했는지 비어있다. 창가 쪽에는 아까 내 뒤에 서 있던 여자가 창밖을 보며 앉아 있다. 저 여자도 혼자 여행 가는 걸까. 청바지에 회색 니트, 그 안에 하얀 셔츠를 입고 있다. 편한 옷차림. 여행 가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고향에 가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선반에 가방을 넣고 자리에 앉았다. 비행기는 잠시 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활주로를 힘차게 달려 하늘로 올랐다.


한 30~40분쯤 지났을까. 비행기가 흔들리더니 기류가 불안정하다는 기내 방송이 나온다. 좌석벨트 표시등에 불이 들어오고 승무원들이 기내를 이동하며 승객들의 안전벨트를 확인한다. 기체가 잠잠해지나 싶더니 다시 흔들리다가 갑자기 고도가 훅 떨어진다.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하다.

창가 쪽에 앉은 여자가 비치된 위생 봉투를 꺼내서 펼친다. 여자의 표정이 좋지 않다. 괜스레 곁눈질로 흘깃거렸다. 눈을 감고 인상을 쓰는 모습이 참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다행히 비행기의 흔들림은 멈췄고 창밖 바다 끝에 제주도가 눈에 들어왔다.


렌터카를 타고 곧장 숙소로 향했다. 성산포 근처로 잡은 숙소는 민재가 나에게 추천한 호텔이다. 애초에 민재가 내게 준 비행기 티켓은 호텔도 포함이었다. 에어텔 패키지. 나에게는 비행기 티켓만 줬고, 다른 한 장의 티켓과 숙소이용권은 제수씨 친구에게 전해졌다.

숙소는 내가 따로 예약해야 했던 이유다. 그러면서 민재는 패키지에 있던 그 호텔이 가격도 저렴하고 시설도 괜찮다고 했다. 블로그 후기를 보니 지은 지 얼마 안 된 탓에 깨끗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이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대학 선배가 제주에서 운영하는 카페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회사생활을 그만두고 제주에 내려가 카페를 차린 선배는 늘 제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한 2년 정도 됐나. 그 선배는 진짜로 제주에 정착했다. 낮에는 카페를 하면서 밤엔 술과 간단한 안주를 판다고 했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 선배에게 연락해 제주에 간다고 했더니, 이제야 오느냐며 타박이다.

“형, 근데 나 설 연휴에 가는 건데 괜찮아? 부모님 댁에 안 가?”


아무렴 연휴인데, 가게 문을 닫진 않을까 물었던 것 같다.

“연휴 때가 대목인데. 장사해야지.”

“돈 벌려고 제주 간 것도 아니면서 쉬엄쉬엄 해.”

“하하하. 만날 쉰다. 사실 손님도 없어. 오기나 해.”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제주 도로를 달렸다. 제주 시내를 벗어나니 여유롭기 그지없다. 날씨도 좋다. 아직 2월 중순인데 이미 봄이다. 평년보다 기온이 조금 더 높다는데 따뜻하다 못해 더운 듯한 기분. 서울과는 완전 딴판이다. 마침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왔냐?”

“어, 도착했어. 이따 저녁에 갈게. 몇 시까지 갈까?”

“아무 때나 와도 돼. 오늘도 뭐 손님이 없다. 일찍 문 닫고 너랑 한 잔 해야겠어.”


선배도 혼자 살고 있다. 나는 싱글, 선배는 돌아온 싱글. 선배네 집에서 신세 지겠다고 할 것을 그랬나 싶었지만, 그래도 호텔에서 자는 게 마음 편하고 좋다고 생각했다.




*

“우와 형네 가게 정말 예쁘다.”


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정말 달랐다. 역시 무엇이든지 직접 보고 겪어봐야 실제를 알 수 있다. 스무 평 남짓 되는 카페는 2층짜리 건물의 1층에 있다. 2층은 집주인이 살고 있다고 한다. 성산 일출봉에서 가까운 곳에 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골목은 한적하다. 군데군데 가게들의 불빛과 한 번씩 들리는 웃음소리뿐.

내부는 조도를 낮춘 조명 덕분에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보여주지만,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고급스러워 보인다. 나는 바테이블에 자리 잡고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쳐 놓았다.


“형, 정말 오랜만이네. 그치?”

“연락 좀 하고 살아라, 얼굴 까먹겠다.”


선배는 알아서 맥주를 꺼내 마시라는 말을 남긴 채 분주히 움직인다. 오픈 형태의 주방은 바에 앉으면 훤히 보이는 구조다. 선배는 주방 냉장고에서 채소와 돼지고기를 꺼내며, 금방 안주 만드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다.


내게 등을 보인 채 요리하며 대화를 이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회사는 여전히 같은 곳인지, 다른 선후배들과는 종종 만나는지, 주로 형이 묻고 내가 대답했다. 말수가 많아졌다는 내 농담에 형은 장사하는 사람 아니냐고 멋쩍어한다.


“형, 내가 도울 건 없어?”

“그냥 맥주나 마시고 있어. 간단하게 제육볶음이랑 조개탕에 한잔하자. 이거 제주 흑돼지야.”


대충 먹자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형은 요리에 열중하면서,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문득 테이블에 손님이 있는 걸 발견했다. 형은 개의치 않는 눈치다. 한쪽 구석 테이블에 자리한 여자 손님은 혼자 온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맥주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었다. 어딘가 낯익는 느낌인데 뒷모습만 보여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손님한테 폐가 될까 봐 목소리를 낮춰 형과 다시 대화를 잇는다.


“저기요, 맥주 한 병 더 주세요, 같은 걸로요.”


한참을 조용히 있던 여자가 바 쪽을 바라보며 말한다. 가늘면서도 또박또박한 발음이 인상적이다. 형은 뒤돌아 “네”하고 대답하고선 나를 바라본다. 손님에게 냉장고에서 병맥주를 가져다주라고 입모양을 보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것으로 줘야 하는지 물었고, 형은 냉장고를 가리키며 위에서 두 번째 줄에 있는 파란색 라벨의 맥주라고 했다.

“맥주 여기 있습니다.”

최대한 친절하게 말하면서 능숙한 아르바이트생처럼 새 맥주를 놓고 빈병을 들었다. 여자는 "고맙습니다"라고 짧게 말한 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기억났다. “비행기 오바이트.” 제주에 올 때 비행기에서 마주친 창가 자리 여자였다. 평범한 옷차림이었지만 얼굴을 보니 떠올랐다.


“네? 뭐라고요?”


여자가 나를 다시 바라보며 묻는다.

“아, 아닙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나는 후다닥 빈 병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여자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지 아니면 아무 일 없는 듯 다시 책을 보는지 잘 모르겠다. 왜 거기서 갑자기 말이 튀어나왔을까. 그 사이 형은 바테이블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으며 자신이 마실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야, 저기 혼자 온 손님한테 같이 한잔하자고 할까?”


이렇게 저녁 시간에 혼자 한잔하러 오는 손님들과 이야기 나눈다는 것이 형의 설명이다. 혼자 조용히 시간을 즐기는 손님도 있고, 가게 주인과 대화하기를 기대하는 손님도 있다고 했다.


“나, 사실 저 여자 알아.”

“정말? 그런데 왜 서로 모른 척 해?”


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묻는다.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사람처럼 목소리가 다소 커졌다.

“아니, 안다기보다는. 비행기에서 옆자리 앉았던 사람 같아서...”

나는 괜히 일이 커질까 봐 겁이 나 살짝 뒤로 빼며 말꼬리를 흐렸다.

“기다려봐, 가서 더 필요한 것 없는지 물어보면서 이야기해볼게.”

형은 테이블로 가더니 여자와 이야기 나눈다. 반짝거리는 눈빛과 큰소리로 웃는 모습이 '나 정말 친절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다시 바 테이블로 온 형은 내 옆쪽에 앞 새 접시와 포크를 놓는다.

“자기도 좋다면서, 책마저 읽고 이쪽으로 오겠대.”


여자가 바테이블로 왔고 인사를 건넨다. 형은 안쪽에서 나란히 앉은 나와 여자를 한 번씩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제야 형이 가게 주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어디를 다녀왔는지, 또 내일은 어디를 갈 것인지 여자에게 물었고, 여자는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이름이나 나이는 서로 묻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 저에게 뭐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맥주 가져다주실 때.”

여자가 나를 보며 묻는다. 여자와 형이 이야기 주고받는 걸 듣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내게 질문을 던지자 당황스러웠다. "아, 그게..."라고 말 흘린다. 그러면서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는데, 뭐가 그리 유쾌한지 형이 웃으면서 대신 대답한다.


“얘는 제주에 놀러 온 제 학교 후배인데요, 비행기에서 손님을 봤다고 하네요.”


형의 말에 나는 민망함으로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여자는 맥주를 한 모금하면서 골똘히 생각하더니 맥주잔을 내려놓고 박수를 친다.


“맞다, 비행기 탈 때 저에게 먼저 타라고 하신 분 맞죠? 옆자리에도 앉으셨고요?”

“아, 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반쯤 채워진 맥주잔에 맥주를 더 채웠다. 여자의 밝은 표정이 내 당황스러움을 녹여내는 것 같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비행기 타기 전 첫 모습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 미소였다. 여자의 얼굴을 슬며시 바라봤다. 수수하게 웃는 모습이 매력 있어 보였다.


여자는 묻지도 않은 비행기에서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한 것일까. 비행기 멀미를 했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밝히면서 힘들었다고 했다. 형은 그걸 또 받아준다. 요즘 같은 겨울에는 기류가 불안정해서 멀미하는 사람이 많다는, 처음 듣는 이야기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하고 있다. 진짜인 줄 알았다.


여자는 갑자기 제주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친구가 사정이 생겨서 자신이 왔다고 했다. 운전을 못해서 대중교통으로 움직이다 보니 쉽지 않은 하루였다며 제주 첫날의 소감을 보였다.


“너도 혼자 왔잖아. 내일 일정 맞으면 손님이랑 같이 움직여.”


난 웃으며 별 의미 없이 내일 어디 가는지, 방향이 비슷하면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여자는 고맙지만 괜찮다고 한다. 솔직히 나도 마음이 없었지만 "됐다"는 말에 괜히 씁쓸해진다. 거절은 아쉬움을 남긴다. 형의 제주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고 자신이 제주에 온 스토리가 펼쳐지면서 빈 술병도 늘어갔다.

“저는 그만 가볼게요.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여자가 형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말한다. 적당히 늦은 밤, 적당히 취한 기분.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이럴 때가 헤어지기에는 가장 좋을 시간이다. 살짝 취기가 올라온 형은 콜택시를 불러주겠다면서 여자에게 숙소가 어딘지 물었다. 여자는 바로 앞에 있는 C호텔이라며 걸어가면 된다고 했다.

“너도 그 호텔 아니야? 우리도 오늘은 이쯤에서 정리하자.”

“저도 그 호텔에 묵고 있어요. 같이 가시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난 여자에게 같이 가자고 말을 걸었다. 같이 걷고 싶었다. 호텔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형네 가게에 왔는데, 지금쯤이면 소리 없는 파도의 일렁거림이 하얀 달빛을 받아 춤추고 있을 것이었다. 사소한 풍경에도 특별하게 다가오는 여행자의 시선,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은 아닐까.


열두 시가 조금 안 된 시각. 형은 시계를 한 번 보더니 여자에게 호텔까지 멀지 않지만 혼자 가면 위험하다고, 밤이라 거리에 사람도 없다고 했다. 여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나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야 같이 가주시면 좋죠.”


그녀와 난 옷을 챙겨 입고 가게를 나섰다. 여자와 나는 골목을 걸었고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대화가 이어졌지만 쓸데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걷는 것보단 나았다. 여자는 바다가 예쁘다며 시선을 돌린다. 꽤 큰 포구다. 그 끝에 있는 C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여자에게 물었다.

“한 잔 더 하실래요?”

“네?”


여자의 놀람은 망설임이 담겨 있다. 대답을 준비하는 동안 내가 말을 이었다.


“조금 더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사실 저도 친구 때문에 여기 오게 됐거든요. 갑자기 제주에 오느라 아무 생각 없이 왔어요. 괜히 온 게 아닌가 싶었는데, 오늘 좋은 친구를 만난 것 같네요.”


앞을 보고 걸으면서 독백처럼 주절거렸다.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소리를 내며 앞으로 지나간다. 오토바이가 인도에 가깝게 지나간 탓에 여자가 깜짝 놀라며 몸을 크게 움찔한다. 내가 두 손으로 여자의 양팔을 뒤에서 잡았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많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잠시 나를 바라본다.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이내 다시 길을 걷는다. 나 역시 여자를 붙잡은 손을 내린다. 여자가 안쪽으로 걷게끔 내가 차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좋아요.”


여자가 내게 말했다.


“네? 뭐가요?”

“맥주 한 잔 더 하자면서요?”

아, 맞다. 나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뭐햐냐’


한창 바쁜 오전에 민재의 카톡 메시지 알림이 울린다.

‘뭐하긴회사지 일한다’

‘이따 저녁에 뭐해?’


딱히 할 건 없지만 오늘은 좀 쉬고 싶었다. 야근 당첨이라고 둘러댔지만 통하지 않는다.

‘됐고. 칼퇴하고 바로 우리 집으로 와. 저녁 먹자.’

‘갑자기 집으로... 무슨일인데’


민재를 종종 만나지만 집에서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민재는 와이프가 수육을 할 거라고 가까이 사는 나도 불러 같이 먹자 했다고 설명했다. 불편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편한 마음도 아니었다. 제수씨의 성의도 있고 지난번 제주 다녀온 것도 있고 해서 알았다고 했다.


제주에 다녀온 지 보름 정도 지났다. 벌써 3월이다. 아직 쌀쌀한 날씨라 3월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제주는 따뜻했는데 말이다. 지난번 제주 여행이 떠올랐다. 지원씨는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제주 여행에서 만났던 여자의 이름이 지원이었다.


“제수씨 잘 지냈어요?”


겉옷과 가방을 거실 소파에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제수씨는 음식이 식을까 봐 아직 꺼내지 않았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다. 손을 씻고 식탁에 와서 앉으려고 보니 수저와 젓가락이 네 세트가 놓여있다.

“누가 또 오기로 했어?”

“응, 한 명 더 올 거야. 와이프 친구.”


민재가 답했다. 그러면 미리 말을 해줘야 하지 않느냐며 잔소리 하자, 제수씨가 민재에게 ‘말 안했느냐’고 나를 거든다.


“말했으면 너 안 올 거잖아.”


그렇긴 하지. 난 불편한 게 싫다. 나와 제수씨 친구를 엮어 주려는 마음은 알겠지만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질색이다. 그래도 분위기를 깰 순 없었다. 올 시간이 됐는데 오지 않는다며 제수씨가 시계를 보는 사이 벨이 울린다. 민재가 인터폰으로 아파트 1층 출입문을 연다.


괜히 신경이 쓰여 머리를 만지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제수씨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엄지를 치켜든다. 부끄럽다. 다시 벨이 울리고 현관문이 열린다. 민재의 인사와 여자가 구두 벗는 소리가 들렸고, 나도 식탁에서 일어서 거실로 나갔다.

“이쪽은 제 절친이고요, 그리고 여기는 와이프 친구. 둘이 인사해.”


민재가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오는 지원과 주방에서 거실로 나오는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소개한다.

“어? 지원씨?”


제주에서 만났던 그녀였다. 당황한 내 표정에 민재와 민재 와이프도 덩달아 같은 표정이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저는 오늘 동건씨 여기 오시는 것 알고 있었는데.”


지원이 활짝 웃으며 내게 답한다.

민재와 제수씨에게 제주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선배네 가게에서 같이 한잔했다고 했다. 여전히 궁금증이 가시지 않은 표정들. "오늘 저녁 재미있겠다"며 민재가 어서 주방으로 가자고 한다.

사실 제수씨는 오늘 나만 부를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원에게서 우연히 연락이 왔고 내 생각이 나서 지원도 불렀다고 했다. 그런데 남편 친구도 온다는 말에 지원이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했다. 제수씨는 지원에게 더 이야기하지 않았고 조만간 만나자고 했다.


상황이 바뀐 것은 그다음이었다. 제수씨는 "그러고 보니 동건씨도 제주도 다녀왔는데"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지원이 내 이름을 듣고서는 관심을 보였고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됐다고 했다.


“갑자기 가게 된 제주에서 만났어요. 우연히.”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얘기했어야지.”


민재가 제일 신나 보였다.


“그럼 동건씨는 지원이가 제 친구인 걸 아셨어요?”

“아니요. 전혀 몰랐어요.”


그저 신난 민재와 달리 제수씨는 퍼즐을 맞추고 싶은 듯했다. 지원은 계속 웃기만 한다. 나는 지원을 비행기에서 처음 봤고 아는 선배 가게에서 다시 만났다고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민재는 뭔가 생각하더니 "그때 비행기 탈 때, 내가 전화번호 주려던 사람이 지원씨였는데"라고 했다.

“지원이 얘기도 들어봐야지.”

“그게 다야. 비행기에서 멀미하는데 자꾸 옆에서 쳐다봐서 민망했는데, 저녁에 또 마주쳤고 이야기 나누다 보니 좋은 사람 같더라고.”


민재가 옆에서 "둘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제수씨가 민재 옆구리를 찌르며 조용히 하라고 한다. 제수씨는 묘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은 눈치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 몰랐는데, 지원씨 보니까... 좋네요.”

“네 저도 좋아요.”


나도 모르게 나온 진심이었는데 좋다고 말해주니까 부끄러워진다.


“그럼, 서울에 와서 두 사람 서로 연락 안 한 거예요?”

제수씨의 마지막 퍼즐이었다.

“연락처를 주고받진 않았어.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해서 인연은 아니잖아. 괜히 연락처 주고받으면 서로 연락해야 하나 싶은 부담도 생길 것 같고.”


지원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제수씨는 이제라도 서로 연락하고 지내라며 휴대전화를 꺼내라고 다그친다. 말이 나왔을 때 해야 한다며 그 자리에서 전화번호를 교환시켰다. 저녁 식사는 화기애애했다.


제수씨는 궁금한 게 남은 눈치였지만 더 묻지 않았다. 좋은 사람과의 자리는 시간이 금방 지나가는 법이다. 그냥 웃고 떠들었을 뿐인데 두 시간은 지나 있었다. 민재는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며 오늘 두 사람 일찍 못 갈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우리 오늘은 이쯤에서 파해요.”

민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수씨가 말한다. 민재가 분위기 좋은데 왜 그러느냐며 와이프에게 말했지만, 나와 지원은 알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제수씨 말의 의미를 민재만 빼고 세 사람은 알고 있다. 잘 먹었다며 조만간 다시 보자고 제수씨에게 눈빛을 보낸다. 민재가 배웅하겠다며 겉옷을 걸치려는데 어딜 가느냐며 제수씨가 붙잡는다. 지원과 나는 부부에게 인사를 건네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단지 정문을 나서자 큰 길이 나왔다.

“제주에서도 이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말끝을 흐리자 지원은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는다.

“우리 한 잔 더 할래요?”


조심스러운 내 말에 지원은 피식 웃는다.

“그러려고 지금 나온 거 아니었어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놓치지 않은 것뿐이다. 작은 이자카야가 눈에 들어왔다. 조명이 너무 환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은근한 느낌이 괜찮다 싶어 지원을 이끌었다.


“다시 한번 만났으면 싶었는데, 신기하네요.”


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고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며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다. 지원이 부끄러운 듯 말을 돌린다.


“동건씨, 주말에는 뭐 하세요?”

“특별한 건 없어요. 밀린 빨래며 청소하고 TV도 보고 그렇죠 뭐.”


“지원씨는요? 혹시 취미 있으세요?”

“저도 딱히 특별한 건 없어요.”


기다리고 있다. 분명하다. 이 사람을 조금 더 알고 싶다.


“지원씨 우리 이번 주말에 제주도 갈래요?”

“네? 갑자기요?”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이제 봄이잖아요. 갑자기 제주에 가는 것도 꽤 괜찮을 여행 같더라고요.”

“네 좋아요. 우리 이번 주말에 가요.”


지원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첫 데이트에 제주 여행이라니, 실수한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이번에는 비행기 예약할 때 날개 쪽 자리로 요청할게요. 중심부가 가장 안 흔들린다고 하더라고요. 멀미하면 안 되니까.”

“에이, 또 그 얘기예요? 창피하게.”


지원은 눈썹을 찡그리며 웃는다. 갑자기 제주에 다시 가게 생겼다. 이번에는 누군가와 함께 간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겨울의 제주는 한순간의 꿈처럼 느껴졌다. 그녀와 함께 주말을 보낼 봄의 제주는 어떤 느낌일까? 서울에도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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