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프라이데이 하노이

by 레이다

#1

사실 베트남 하노이를 갈지 말지 일주일은 망설였던 것 같다. 지난해 가을, 얼리버드 특가로 나온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면서 환불이 불가능하다는 안내 문구를 알고 있던 터였다. 그땐 몰랐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변할 줄은. 불과 4개월여 만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즐거울 것으로만 상상해 왔던 하노이 여행은 출발도 전에 시작해도 되는지 겁부터 나게 만들었다. 하노이행 비행기에 오른다면 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인천공항으로 가는 6019번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는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여행을 떠나곤 한다. 6개월 정도 미리 비행기 티켓을 구입해, 떠나는 날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지루한 일상을 버티는 습관이 있다. 하노이행 비행기 티켓은 작년 10월에 샀다. 저가 항공사의 이벤트를 전부터 노리고 있었다.


정작 티켓 예매에 성공해 놓고서 얼마나 저렴한 것인지도 몰랐다. 얼마 전 하노이를 다녀온 친구에게 얼마에 비행기 티켓을 구입했는지 물었던 것 같다. 내 왕복 티켓 가격은 평소보다 20만 원 이상은 더 쌌다. 스스로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생각하면서 뿌듯해했다. 티켓 구매 안내 사항에 적혀 있는 <환불 불가> 문구를 분명 확인했지만, 이렇게 저렴한 티켓을 환불할리 없을 것으로 확신했다.

버스는 영종대교를 건너고 있다. 썰물 탓에 바다는 울퉁불퉁 갯벌이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다.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을 생각했지만 움푹 파인 검은 바다는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만들었다.


그냥 가지 말까. 비행기 체크인을 하기 전까지는, 아니 탑승하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챙긴 짐도 많지 않다. 작은 백팩에 속옷과 양말, 갈아입을 셔츠, 휴대폰 충전선 정도였다.


목요일 오후라 그런지 공항이 붐비진 않는다. 항공사 발권 창구로 향했다. 체크인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지 않아 대기 줄도 짧다. 기다리는 시간이 짧았기에 내 마지막 고민의 시간도 금세 지나가버렸다. 비행기 티켓을 받고 백팩을 수화물로 부쳤다. 기내에 들고 탈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또 그때까지 비행기를 타지 말까 하는 고민을 할 것 같았다. 차라리 짐을 부치면 다시 찾는 번거로움 때문에라도 생각을 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방이 없으니 몸이 가벼워졌다. 출국장으로 향했다. 보안검사와 전자심사에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너무 순식간에 끝나버려 허탈한 마음이 든다. 시간이 꽤 남았기에 무엇을 할까 하다가 서점으로 향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집을 한 권 샀고, 근처 라운지에 들어갔다. 은행에서 일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발급한 신용카드에 라운지 무료 이용 혜택이 있었다.


휴대전화로 하노이 날씨 검색하고 시내 주변의 괜찮은 펍을 찾아봤다. 이제 가야 할 시간. 비행기에 올랐다. 자리에 앉아 좌석벨트를 채웠다. 꽉 조이는 느낌이 답답해 느슨하게 했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답답함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고 머리를 뒤로 기댄 뒤 눈을 감았다. 한숨 자고 나면 하노이에 도착해 있겠지.



#2

3월 말의 하노이는 일 년 중 날씨가 제일 좋은 때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한국의 5월 느낌이다. 베트남 시각으로 밤 열한 시 넘어 하노이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보다 시차가 느려서 다행이지 더 빨랐다면 새벽 두 시였을 시간이다.


늦은 시각 호텔에 도착해서는 간단히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그러고는 침대에 쓰러졌다. 푹 자야겠다는 생각에 여덟 시로 알람을 맞춰 놓았건만 새벽 다섯 시에 눈이 떠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노이에서의 새벽 다섯 시는 한국에서의 아침 일곱 시다. 출근을 위해 내가 매일 일어나는 시간.


오래 적응된 신체 리듬은 갑작스런 시차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조금 더 잘까 하다가 일어나 TV를 켰다. 알 수 없는 베트남어가 들렸다. 채널을 돌리다 음악방송에서 멈췄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저 노래가 사랑 노래인지 이별 노래인지는 알 수 있었다.


여섯 시쯤 되니 창밖이 소란스럽다. 가만히 창을 열었다. 하노이의 아침은 처음이다. 하노이 거리 풍경이 색다르다. 호텔 앞 거리에는 노점이 펼쳐져 있다. 아침식사나 아침식사 재료를 파는 듯했다. 생선과 과일을 파는 노점도 보였다. 노점이라고 해봐야 리어카에 장을 차린 여자들 또는 소쿠리 하나를 들고 나온 할머니였다.


대충 옷을 입고 1층으로 내려왔다. 프런트 직원과 눈이 마주쳤고 직원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괜히 멋쩍어 나 역시 밝게 웃으며 다가갔다. 너무 반갑게 인사하는 통에 뭐라도 물어보면서 대화해야 할 것 같았다.


"하우 캔 아이 고우 투 더 동쑤언 마켓?"


프런트 직원은 자신의 책상에서 지도 하나를 펼친 뒤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걸어서 넉넉히 삼 심분 정도면 갈 수 있다고 하니, 어차피 여유 있게 일정을 보내기로 한 김에 동네 구경도 할 겸 걷기로 했다. 문을 열어주는 도어맨에게 땡큐를 말하고 밖으로 나서는데 날씨가 참 좋다. 따뜻하다. 한낮에는 살짝 더울 것 같지만 여름처럼 땀이 흐르거나 인상을 찌푸릴 정도는 아닐 것 같다.


로컬 마켓을 가는 것 역시 습관이다. 어느 도시를 가게 되면 그곳의 재래시장을 가게 되는데 사실 특별한 건 없다. 점심때가 다되어 시장을 빠져나왔고 하노이에서 유명하다는 쌀국숫집에 갔다. 하루 동안 한 도시의 음식점 투어를 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줄이 길다. 대기번호를 받을까 하다가 그곳에 있는 사람의 절반은 한국 사람처럼 보여서 갑자기 흥미를 잃었다.


얼마나 맛있기에 이렇게 한국에서 온 사람들까지 줄 서서 먹는지 호기심보다 남들과 같은 곳은 피하고 싶다는 거부감이 더 컸다. 이곳에서 쌀국수를 먹겠다고 한국에서부터 생각했는데, 마음이 변하는 건 한 순간이다. 너무 쉽게 변해버린 내 마음이 어이없어 혼자 피식 웃는다.


바로 옆 다른 쌀국수 식당에 들어갔다. 대조적으로 이곳은 한가하다. 테이블 세 개짜리 작은 식당에 가운데 자리만 빼고 양 옆은 이미 식사 중이다. 왼쪽 테이블 손님은 베트남어로 전화 통화하는 걸 봐서 현지인 같고, 오른쪽은 백인 여행객이었다.


이내 쌀국수가 나왔고, 라임을 짜 넣은 뒤 국물을 맛보았다. 한국에서 먹던 국물 맛과 비슷하면서 뭔가 다르다. 오른쪽 백인 남자 여행객과 눈이 마주쳤다. 혼자 먹고 있던 이 남자는 내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고 여행 중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스웨덴에서 왔다고 했다. 하노이에 온 지 이틀 됐는데, 이틀 더 머무르다가 호찌민으로 간다고 했다. 먼저 일어나겠다는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노이에서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은 없었다. 다시 숙소 근처로 돌아왔다. 숙소 가까이에 있는 커다란 호수를 산책했다. 햇살이 내리쬐는 호수가 반짝거린다.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휴대폰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여유로움. 호수를 따라 걸으며 건너편 상점들을 구경했다. 상점 주인인지 점원인지 모르지만 다들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식사를 마친 이후여서일까. 간혹 의자에 기대어 앉아 낮잠을 청하는 모습도 보였다.


호수 건너편 큰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호수가 잘 보이는 노천카페. 연유가 들어간 아이스커피를 주문하고 휴대폰 카메라로 호수와 주변의 풍경들을 찍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 여성들이 수다를 떨고 있다.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어린 직원이 그녀들을 서빙한다.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인데 나만 혼자 불편한 기색이다. 공항에서 사들고 온 책을 꺼내어 읽었다. 나도 그들의 무리 안에서 여유로움을 느끼고 싶었다. 아무런 걱정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3

밤이 되고 간단히 식사를 마친 나는 호텔로 향했다. 특별히 밤거리를 걷거나 유흥을 즐길 마음은 없었다. 호텔에 다다를 무렵 고급스러운 펍이 눈에 들어왔다. ‘POLITE’라고 간판에 적힌 영어 이름과 창 안으로 보이는 어두컴컴하면서 매혹적인 분위기가 재즈바를 콘셉트로 하고 있는 듯했다. 술집 이름이 왜 폴라이트일까. 예의 바른 주인이 운영하는 곳이거나 혹은 고상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잔하고 자야지 생각하며 펍을 들어가려는데, 한 여자가 급하게 문을 열고 그곳에서 나온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베트남 말로 뭔가 이야기한다. 미안한 표정으로 시작해 웃는 얼굴로 말을 맺는 걸로 봐서는 내가 들어가려는데 문을 밀고 나온 통에 괜찮으냐고 묻는 것 같았다.


펍 안은 엔틱 가구들 때문인지 고급스러웠다. 외국인이 절반, 현지인이 절반쯤 되어 보였다. 바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는 대부분 칵테일로 채워져 있다. 주위를 보니 다들 칵테일을 마시는 분위기. 진토닉을 주문했다. 라임 향이 강했지만 나쁘지 않다. 저 쪽에서 바텐더로 보이는 직원이 다가오더니 내게 맛은 괜찮은지 묻는다. 영어로 묻고 영어로 답하는데 의사소통이 완벽하지 않다.

이곳에 들어올 때 출입문에서 마주쳤던 여자가 다시 들어온다. 아무리 높게 봐도 이십 대 중반 정도다. 베트남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만났던 베트남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외모였다. 예쁜 얼굴이다. 피부도 하얗고 키도 큰 편이고 옷을 입는 스타일도 세련됐다. 그 여자가 내 앞에서 가던 길을 멈췄다. 내 옆에 앉아도 되느냐고 묻는다.

"슈어, 해브 싯."


그녀는 처음 마주쳤던 조금 전의 베트남어 대신 유창한 영어로 내게 말을 꺼냈다. 아까 다치진 않았느냐고. 그리고는 일본 사람이냐고 묻는다. 난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이후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여긴 왜 왔는지, 언제 왔는지, 오늘은 무얼 했는지. 여자의 눈빛은 호기심이었다.


내가 이름을 물었다. 자신의 이름은 아한이라고 했다. 친구와 함께 이곳에 왔는데, 친구는 먼저 가버렸다고 했다. 스타벅스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는 낮에 나를 본 것 같다고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낮에 호수 앞 노천카페에서 나와 골목골목을 다니며 구경했었다. 그러기를 한 시간 하노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에 내 발걸음이 멈췄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노트르담 성당을 모티브로 지어서인지 유럽의 건축물처럼 보였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군데군데 기도하는 사람 틈에 끼어 가만히 앉았다.


높은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의 좌우 창이 웅장함으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내가 하노이에 온 이유가 떠올랐다. 그녀와의 마지막 여행. 혼자 왔지만 혼자 온 것만은 아니다.

하노이에 함께 오려던 약혼자. 사실 그녀와 함께 오기로 했었다. 하지만 하노이에 오기 한 달 전 그녀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결혼을 약속했고 하노이를 다녀와서는 양가 상견례가 예정되어 있었다. 상견례는 단지 본격적인 준비를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다. 하노이에서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계획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퇴근한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아파트 정문 건너편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렸고, 길을 건너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새벽 한시쯤이었다고 들었다. 밤에는 차가 잘 다니지 않는, 아파트 단지를 끼고 난 이면 도로. 사고를 낸 운전자는 아직 찾질 못했다.

한 달여의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갔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은 슬픔을 느낄만한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바로 출근했지만 회사에서 휴가를 주어 며칠 동안 멍하니 집에만 있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다시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하루, 일주일이 지나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일상에 달라진 건 그녀가 없다는 것 하나뿐인데, 모든 게 사라진 것 같다.


주말에 하노이를 다녀올 것이라고 친한 친구에게 말했을 때 그 친구는 잘 다녀오라는 말뿐이었다. 내가 하노이에서 프러포즈할 것을 알고 있는 친구였다. 친구에게 그녀와의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아무런 인사 한 마디 없이 떠난 그녀처럼 나도 말없이 그녀를 놓아주어야 한다.


나 혼자 하노이를 가는 데 죄책감이 들었다. 주변에서 나를 어떻게 볼지도 걱정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눈치 살피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꼭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하노이 여행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녀를 보내면서 할 수 있는 나의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하노이를 이야기할 때마다 가고 싶다고 했던 곳들을 돌아다닌 건 그녀를 대신해 그녀의 기억 속에 담아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한이라는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내 얼굴 바로 앞까지 들이대면서 내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고 묻는다. “아임 쏘리.”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되묻자, 낮에 스타벅스에서 나를 본 것 같다며 혹시 오지 않았냐고 말한다. 성당을 나와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렀다고 했다. 일하는 곳이 그곳이냐고 묻자 맞다고 대답한다.


아한은 한국에 대해 궁금해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한 잔만 하고 일어서려던 계획이었는데 벌써 두 시간 째다. 알아듣는 이야기도 있었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도 있었다. 해석 안 되는 게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들이다.


시간은 열한 시가 되어간다. 이제 그만 일어나려고 그녀에게 즐거웠다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마신 칵테일까지 내가 계산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녀 덕분에 진심으로 즐거웠다. 힘없는 웃음이었지만 오랜만에 누군가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눴다. 그녀에게 인사하고 펍을 나서는데 그녀가 쫓아 나온다. 내 룸에서 맥주 한잔 더 해도 되느냐고 묻는다. 망설였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그녀가 내게 팔짱을 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내가 묵는 호텔로 향했다.


호텔 방에 들어왔지만 맥주는 냉장고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약혼녀 아닌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내는 건 처음이다. 약혼녀가 아니고서는 다른 여자의 몸이 어색하기로는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같다. 몸을 섞는데 말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대화가 완벽히 통하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는다.

죄책감이 들었다. 아한에게서 약혼녀를 찾은 것도 미안했다. 보내지도 붙잡은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본능적인 몸짓이 이어졌다. 강약을 조절하며 리드하자 그녀가 순순히 따라온다. 온몸의 자극을 나에게 맡기듯 사소한 손짓에도 바로 반응이 왔다. 능숙하지 않은 어설픈 반응이 오히려 나를 더욱 끌어들였다.


약혼녀가 떠난 이후 처음으로 새벽에 깨지 않는 밤을 보냈다.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아침 열 시가 넘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갑과 여권을 살폈다. 모든 게 그대로다. 잠시나마 그녀를 의심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탁자 스탠드에서 메모를 발견했다. 일을 해야 해서 먼저 일어났다며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남겨 놓았다.




#4

늦은 밤 비행기로 한국에 간다. 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린다. 한국에 도착하면 일요일 아침이 되어있을 것이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짐을 챙겨 방을 나왔다. 짐이라고 해봐야 백팩 하나가 전부다. 체크아웃을 하고 나니 열두 시가 조금 안 됐다.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까지 예닐곱 시간 정도 남았다.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전화하는 대신 그녀가 일하는 스타벅스로 향했다. 가는 길에 꽃을 한 묶음 샀다. 무슨 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프리지아와 비슷해 보인다. 하노이를 걷다 보면 꽃 파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된다. 사계절 날씨가 좋아서인지 꽃이 많은 나라 같다. 그녀에게 선물하기 위해 산 건 아니었다. 지나가는 길에 꽃이 눈에 들어왔고 사고 싶었고 누구에게라도 주고 싶었다.


그녀가 일하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는 카운터에서 손님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이내 나를 알아보고는 눈이 커지더니 활짝 웃으며 반가워하는 얼굴이다. 하룻밤을 같이 보낸 게 전부였지만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익숙한 느낌이다. 아이스 카페라떼를 주문하고 잠시 서서 기다린다. 그녀의 동료들이 누구냐고 묻는 눈치다.

그녀가 내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에 앉는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만나러 온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오후 다섯 시에 일이 끝난다고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먼저 말했다.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다며 아쉬운 듯 미간을 찡긋 거린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려는 그녀의 손을 잡고 노란 꽃 한 묶음을 건네주었다. 이곳에 오다가 꽃이 예뻐서 샀다고 했다. 그녀는 놀란 눈치다. 꽃에 코를 가져다 대어 향기를 맡는다.


카페를 나와 길을 걸었다. 마치 시선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려는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장면 장면을 눈에 담는다. 골목골목을 걷는다. 예쁜 도자기 그릇들이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구경하고 세련된 스타일의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에코백 가게에도 들어가 봤다. 하노이에 같이 오려던 그녀와 함께였다면 그녀의 손에 이끌려 들어갔을 상점들이다.


그녀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의 상품들이 내 손에 들려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는 유리컵이며 접시에 특히 관심을 두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걸 들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턱 막힌다. 신문으로 둘둘 포장한 물건을 다시 내려놓는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으로 가고 있다. 호텔로 향했던 이틀 전 택시와 달리 공항으로 갈 때에는 공항버스를 탔다. 버스는 시내 곳곳을 거치며, 하노이에서 보지 못한 다른 풍경을 내게 선사했다. 너무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마치고 출국장으로 들어선다. 탑승권 하단에 찍힌 시퀀스 넘버가 1이다. 내가 처음으로 체크인을 한 모양이다.


아한이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신경 쓰였지만 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머니 속에 휴대전화 번호가 적인 쪽지를 꺼냈다. 이곳을 떠나기 전 이곳에 두고 가야 할 것 같았다. 활주로와 계류장이 보이는 창 쪽 어느 벤치 자리에 쪽지를 두었다. 바람에 날려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질 테고 결국 사라질 것이다.


잊히겠지. 그녀와의 이별은 운명처럼 예정된 일이다. 아주 잠시나마 마음을 나눴고 즐거웠다면 그걸로 된 거다. 잊히더라도 잊지 못할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이별은 떠나는 이에게도, 남겨진 사람에게도 냉정하다.


비행기에 올랐다. 맨 앞에서 두 번째 열 창 측 자리다. 첫 번째로 체크인하며 앞쪽 좌석을 요청했지만 1열은 이미 지정이 돼 있었던 모양이다. 하노이에 올 때와 달리 내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았다. 복도 측 자리에는 중년의 남성이 앉았다. 누군가 내 옆자리를 채우겠지. 하지만 비행기 문이 닫히고 안내방송이 끝날 때까지도 옆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자리에 여유가 있어서 띄엄띄엄 좌석을 배치한 건 아닐까. 주말을 마치고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만석이다.


분명 내가 예약한 두 장의 티켓 중 하나는 탈 수 없게 되었다고 이미 항공사에 전달한 상태였다. 환불이 되지 않는다는 답변에 상관없다고도 했었다. 하노이에 올 때에는 채워졌던 옆자리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지금은 비어있다. 이상하게 허전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떤 생각도 없는 사람 같다. 답답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가져온 짐도 별로 없는데 무엇인가 하노이에 두고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잠을 청하기로 했다. 눈을 뜨면 아침이 되어 있을 테고, 한국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하노이에 다시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아마도. 의식적으로 내 안에서 밀어낼 것 같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을 순 없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다. 단념해야 한다. 그게 무엇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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