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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y Choi Nov 21. 2018

다시 은둔을 꿈꾸는 친구에게 - 김영하

- H의 결혼에 부쳐


스무살 무렵엔 누구나 은둔을 꿈꾸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어촌에 
작은 낚시집이나 하나 열어서 살아가는 꿈. 
또는 땡중이나 수도승이 되어 
산사의 목어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꿈. 
백두대간 봉우리 하나쯤 잡아서 산장지기를 하며 늙어가는 꿈. 
그때는 그게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가끔 세상은 나를 성가시게 하고 
인연이 없는 여자들은 매몰찬 상처만 남기고 떠나가지. 
스무살 무렵에는 유난히 그런 일이 많은 법이지. 

가끔, 자살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네. 
마음 주지 않는 여자나 
허망하게 무너진 추운 나라 때문에 
음습한 거리를 청바지에 손을 꽂은 채 
헤매기도 했을 것이네. 
그런 때면 하늘은 너무도 청명하여 
새들조차 날아다니지 않지. 

스무살 무렵에는 보고 싶은 사람도 많았네. 
무인도에 함께 가자던 초등 학교 동창생들이 그립고 
공주같은 옷을 입고 다니던 짝궁이 그립기도 하지. 
심지어 무던히도 두들겨패던 
중학교 2학년 담임선생이 그립기도 하지. 

그때는 전화벨이 울려도 반갑기만 했지. 
수화기를 들 때마다 새로운 날들이 펼쳐지는 것 같았네. 
이별을 고하는 전화, 
새로운 만남을 예고하는 전화,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전화들이 
앞을 다투어 달려들었지. 

토악질로 범벅된 입영전야. 
자아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그런 노래를 부르며 밤새 거리를 헤매며 
누군에겐지 모를 발길질을 해대며 눈물을 뿌려댔어도 
그땐 외롭지 않았네. 
대가리박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화장실에서 삼켜버리는 소보루 빵맛도 기가 막혔지.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이 
때로는 정겹기도 했을 것이네. 

스무살 무렵, 세상은 언제나 낯설었지. 
사람들은 바삐 떠나가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오지. 
맑스 떠난 자리에 푸코가 들어앉고 
조용필은 21세기가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데도 사라졌네. 
군복을 벗고 찾아온 교정에는 
막바지 진달래만큼이나 싱싱한 젊음들이 
배타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네. 
시험지 한 장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언어를 상실했다는 사실을 그때쯤 깨닫게 되지. 
남몰래 도서관에서 시험지 채우는 연습을 하는 동안 
세월은 시험지 채우기보다는 쉽게 흘러가지. 

스무살 무렵. 어떤 여자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지. 
인간이 얼마나 바보스러워질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그런 여자. 
그런 여자는 포기할만하면 다가와 
은전처럼 말을 흩뿌리고 지나가네. 
그래서 상처는 더 오래도록 곪아가지. 
그런 세월이 계속되면 마음 속에는 두려움마저 생기네. 
그녀는 어머니가 되고 누이가 되고 간호교사가 되지. 
그런 여자를 만난 가을이면 
음악은 소금이 되고 마음은 염전이 되지. 
염전의 물을 퍼내느라 하루종일 수차를 돌리는 세월. 
그 세월이 오래면 
짜디짠 소금처럼 음악들을 사랑하게 되고 
그 음악들은 하나둘 상처 위로 
내려앉아 감각을 퇴행시키지. 
산울림과 조용필, 들국화가 귓전을 떠나지 않게 되고 
어느새 음악에서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그런 여자를 만난 겨울이면 서가에는 책이 쌓일 것이네. 
지리산 토끼봉을 넘어 변산반도로 뛰는 사랑, 
사랑하는 여자가 조총련이어서 간첩이 되는 사랑, 
독일인의 사랑, 
구월산 재인말에 천기로 스며들던 묘옥의 사랑, 
그런 사랑들로 마음을 다스리네. 

그러나 참 추운 겨울이었네. 
그런 겨울이면 친구들은 군대로, 
외국으로 하나둘씩 떠나가네. 

그러다 봄이 되면 모임들을 기웃거리기도 했네. 

함께 세미나를 하고 거리로 달려나가거나 
어두운 뒷골목 소주집에서 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네. 
여기 오네 젊은 넋들 들판을 가로질러.... 
생머리를 질끈 동여맨 
여자 선배 들은 그럴 때 참으로 아름다웠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소주를 따라주던 그런 선배를 
죄스럽게 훔쳐보면서 
쓴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동안에도 
세월은 차곡차곡 흘러갔네. 

그 선배들도 하나둘 교정을 떠나고 말지. 
도서관에 처박혀서 9급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고 있거나 
양복입은 남자와 거리를 거닐며 미래를 설계하고 있지. 

어느 비오는 날 아침, 
쓰린 속을 만지며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이젠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그럴 때 둘러본 책장의 책들 위에는 
뽀얀 먼지가 앉아있고 
지난 1년간 단 하나의 음반도 
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마음을 아리던 여자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으며 
지난 며칠간 단 한 통의 전화도 
울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지. 

이십대가 간 거지. 
비록 아직은 나이에 ㄴ 자가 들어가지 않는다해도 
실질적인 이십대는 서해 낙조처럼 부질없이 스러져갔다는 걸 
자신만은 잘 알게 되는 거지. 

무심코 뒤져본 지갑 속에선 
옛 친구들의 명함이 비져나오고 
그들의 이름은 거개가 한자로 적혀있곤 하지. 
우편함에는 듣도 보도 못한 발신인의 카드들이 
들어있기 시작하지. 

왜 청첩장에는 부모 이름이 적히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없이 백색 아트지로 된 
그 종이들을 서랍 속에 밀어넣게 되지. 

문화적 삼십대는 그렇게 시작하네. 
사람이 그립지만 막상 만나면 아무도 그립지 않네. 

기형도의 시를 다시 읽게 되는 것도 그 무렵이네. 
밤마다 열쇠로 따고 들어오는 자취방은 
보일러를 켜도 스산하기만 하지. 
시리즈 비디오를 빌려보게 되고 
반쯤은 다 못보고 반납하게 되고 
가끔 극장가를 배회하기도 하지. 

그럴 때 한 여자를 만나게 되지. 
이제 바보짓은 하지 않아도 좋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여전히 서툴고 어색하지만 
세월은 사람을 허투로 관통시키지 않기에 
이제 다소는 무덤덤하고 심드렁하게 사랑을 고백해보게 되지. 

그런 방식이야말로 
서로의 상처를 줄이는 방법임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인간이 만든 최악의 제도라던 결혼이 
차악으로 보이게 되는 것도 그 쯤이고 
서로를 간헐적으로 외롭게 만드는 더벅머리 친구보다 
지속적으로 외롭게 만드는 반려가 
더 나아보이는 때도 그 무렵일 것이네. 


스무살 무렵에는 여자의 매력이 마음을 데우지만 
이제는 여자의 아픔이 용기를 북돋게 되지. 
스무살의 전장에 묻고 왔다고 믿었던 부장품들이 
옷장 속에서 기어나오지. 

열정, 질투, 희망 따위. 

말없고 단정하던 그녀가 
자신에게만 응석을 부리기 시작하지. 
월급을 탄 그녀가 중저가 브랜드의 티셔츠를 사다주면 
그게 쑥스러워 
일부러 옷자락을 바지 밖으로 빼어내서 입고 다니지. 

하늘의 빛깔은 여전히 어둡고 앞날은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게 되지. 

소설이 재미없어지기 시작하네. 코미디 영화가 좋아 지네. 

그래도 가끔 스무살 무렵을 생각하네. 

밤새 술 마시던 골목을 지날 때면, 
그때 읽던 책을 책장에서 치울 때면, 
가끔 담배를 피워대네. 

그땐 그래도 자유로웠다, 고 생각하지. 

오, 그때의 그 자유가 얼마나 버거웠는지, 
얼마나 성가셨는지, 
얼마나 사람을 환장케했던 지를 생각하면서 
이제 더 이상 그 자유를 그리워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네. 

어느날 자리에서 일어나 면도를 하게 되지. 

면도날을 새것으로 갈아끼우고 
그녀가 사다준 면도거품을 정성껏 바르고 
뜨거운 물을 세면대에 받아서 말이네. 
그리고는 머리를 깎고 몸에 잘 맞지 않는 이상한 옷을 입고 
황급히 달려가네. 
꼭 황급히 달려가야만 하네. 그게 어울리네. 

그렇게 달려가면 거기 
신부가 역시 이상한 옷을 입고 피곤한 표정으로 기다리네. 

그때 잠시 멈추어서서 뒤를 돌아다본다네. 
무진기행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오를 것이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그러나 머리를 세차게 내젓고 걸어가 신부의 손을 잡네. 

서른살 무렵에 다시 은둔을 꿈꾸지. 
그 운둔은 스무살 무렵의 은둔과 다른 
새로운 은둔일 것이네. 

새로운 은둔의 동반자와 함께 걸어나가네. 
드보르작의 한여름밤의 꿈이 울려퍼지네. 

마흔 무렵이 되면 다시 이런 글을 쓸 것이네. 

서른 무렵에는 누구나 은둔을 꿈꾸지, 로 시작하는 글 말일세. 
당신이 부럽네. 축하하네. 

이제 새로운 세계로 걸어가게. 
다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싸우고 토악질하고 부둥켜 안고 울기를 바라네. 

그래야 마흔이 되어도 이런 글을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네. 
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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