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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 Oct 16. 2019

그대들의 결혼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

지인 딸이 결혼을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목소리를 낮추고 마치 자신이 결혼을 하는 것처럼 부끄러워하면서. 여기저기 알리고 축하 받아야 할 일이 아닌가 하다가도 경조사는 오히려 상대의 시간과 일정 비용에 양해를 구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알려야 될 지를 모르겠다고, 정말로 친한 친구, 사회속에서의 인연이 오래 지속된 관계를 솎아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그냥 축하의 인사말만 받겠다고는 하지만 모바일 초대장의 전송 버튼을 누르는 것이 망설여지게 되는가 다. 우리 딸과 비슷한 또래의 딸을 떠나 보내는 엄마의 심정을 어떨까.  청첩장 속 앳된 젊은 아이 둘이 두 손을 잡고 해맑게 웃고 있다.  사진속 아이들은 과거나 불확실한  미래 따위는 없고 지금 이 순간이 신난 놀거리를 가진 것처럼 환하고 충만함으로 가득하다.

딸을 보내는 엄마는 섭섭하고 묘한 기분이 들어 잠을 잘 수가 없다고, 그도 그럴 것이 학업도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고, 집도 혼수도 그 흔한 반지도 없는 그저 둘만의 결혼이기 때문이다. 부모 소꿉놀이도 아닌 결혼이라는 사회계약이 그들의 앞날에 무엇인가 달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일까. 준비된 결혼은 미래의 행복을 가늠할 조건이 아님을 알면서도 죽을때까지 자식에 대한 끈을 놓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어찌했든 부모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오롯이 둘만의 삶을 당당히 걸어가려는 젊은 그들의 의지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예식 날 신랑신부는 가을 햇살보다 환했고  마치 파티를 하는 이들처럼 당당히 그 시간을 함께 즐기고  있었다.  입장도  혼인서약 낭독도 노래도 함께 했고  흔한 은사의 주례도 없이 자신들이 식을  끌어갔다.

비혼주의가 팽배하고 결혼은 해도 아이갖기를 꺼리는 요즘 결혼은 젊은이들에게는 결혼식이라는게 사치임에 분명할 것이다. 웬만한 경제력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 더구나 결혼과 동시에 집이여 아이 육아문제 시댁이라는 연결고리가 또하나의 관계의 연장선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그저 현재의 나의 모습과 의지만이 필요 할 뿐이다.  그 의지는 살아가면서 흔들릴 수도 더 견고해 질 수도 있지만  지금의 나의 모습과 현재의 마음에 충실하는 것이 최선의 삶의 태도이다.

20여년이 훌쩍 뛰어 넘은 우리 대의 결혼식이라는 건 어땠나.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해야한다는 의무감. 때가 지나면 혼기를 놓친다는 외부의 압박감에, 예의와 남에게 보여주기 식의 겉치레 결혼문화여서 결혼 삶의 질을 떨어 뜨렸다. 오고가는 혼수와 예단, 남자의 직업, 재력,  여자의 미래를 가늠 할 조건들을 보며 그들의 결혼의 행복 수위를 결정지었던 요소들. 사랑이 밥먹여 주기는 커녕 통장의 잔고마냥 바닥이 드러나면 굶게 다고 그래서 어찌됐든 조건대 조건의 결혼이 암암리에 퍼져 있었던건 사실이다.

오죽하면 중매쟁이가 있었을까. 연애를 맘껏 즐겨도 결혼만큼은 신중해야 '현명한 여자'라는 말을 들을정도로 여자의 일생은 결혼에 결정이 나는 '행위'였다.


 30년  친구의 첫 결혼식, 삼풍 백화점 옆 사법 연수원 기념회관에서 치뤄진 예비 검사와의 예식은 플랭카드와 터질  이어진 화환, 식장 밖으로까지 가득찬 손님들을 보며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지켜보았었다. 그 친구가 지금은 어찌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부와 권력을 거머쥔 놀라움과 한편에선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확실했다.

 배우자는 부모찍어  이와 해야 평생이 편하다는 말을 했을까 싶다. 딸이 잘 살아야 그 덕(물질) 한조각이라도 제 부모에게도 안겨 줄 수 있으니 말이다. 부와 사랑의 감정은 비례하지 않겠지만 남성 우위 시대의 사회구조속에서 여자는 누구에 의해 선택받고 선택되어지는 존재였다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시대가 바뀌고 아이들이 배우자를 만나기 전 동거도 하고  이후에 결혼을 선택하고,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는 일이 흔해졌다. 더 큰 후회가 되기 전에 헤어지는 일도 나쁘지 않다. 잘 헤어지고 잘 만나는것,  인생이 만남의 연속이며 사랑은 행위를 넘어선 '무언'이다.   '무언가' 내가 가꾸고 꾸려 나가는 권리와 선택이다. 다만 주체적으로 스스로의  방향키 잡고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이 방종이 되기 이전에 나를 세우고  내 삶을 일으킬 수 있어야 결혼생활도 건강하게 지속가능 할 것이다.

스물 다섯 딸아이는 만나는 남친이있음에도 자신은 아직 비혼주의자라고  말한다. 살아가다 보면 자신들의 마음이 어찌될 지도 모르고 평생을 함께 하기보다 자신의 일을 하며 만남의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다고 그래서  강요되지 않는 삶을 추구하고 싶다고. 아무래도 제 부모의 미덥지 않았던 결혼 생활이 제 인생의 지침서가 되었나 보다.

어찌하든 난 너의 선택을 존중하고 시시콜콜 조언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삶은 필수보다는  선택이 과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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