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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라하라의 나쵸 아저씨

Guadalajara#1

by 세라

수상한 동거의 시작


과달라하라는 원래 가려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공항이 있는 도시여서 비행기를 타려고 간 김에 며칠 묵었다. 사실 호스텔에 가는 길엔 택시 안에서 오토바이가 창문을 치며 싸우는 걸 봐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과달라하라는 나름 치안이 좋다고 하는 곳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예약한 호스텔에 도착했을 때였다.


신기하리만큼 좋은, 약간 과장해서 호텔급의 호스텔이었다. 나는 가난한 여행자였으므로 항상 호스텔 도미토리 방을 예약했다. 과달라하라에서도 마찬가지였고, 평범한 가격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시설이 굉장히 좋았고, 무엇보다... 2인실(!)로 안내를 해 주는 것이었다.


2인실 안에는 화장실도 따로 있고, 두 명이 자도 될만한 넓은 침대도 2개, TV, 개인용 스탠드, 개인용 서랍, 옷장, 선풍기 등... 완벽한 스위트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방문을 열자, 왠 건장한 남자가 스웩 넘치는 몸짓으로 나를 맞이해주는 것이었다!


"헬~로!"

"H..e.. hello 헬로

...그런데 이게 도미토리라는데, 맞아요?"

"저도 이런 곳은 처음이에요!"


그리고 그 남자는 재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저 게이예요"

"....????

"농담이죠?"

"진짜예요"


그러고는 넉살 좋게 하루 먼저 와서 파악한 각종 물건 위치와 기계 사용법을 설명해주더니 산책을 하고 온다고 하고 나갔다. 나는 벙벙하게 방을 훑어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했다. 그는 내가 편하게 쓸 수 있도록 일부러 배려를 해 준 것 같았다.


남녀 혼숙 도미토리가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는데 2인실 도미토리라니! 혹시 헷갈린 게 아닌가 하여 재차 물은 다음 당장 결제하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게 도미토리가 맞았다.


그리하여 낯선 남자와의 수상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나는 과달라하라에 3 있었고, 그내가 오기 전날 밤 도착해 4일을 묵어서, 우리는 과달라하라를 여행하는 내내 같은 방에서 함께 묵었다.


(지나고 보니 폰으로 대충 찍은 이 사진 2장밖에 없다.)



나쵸 곤잘레스


중남미나 스페인 문화를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쵸'가 그쪽 동네의 전형적인 이름이라는 것을. 하지만 난 그때는 몰랐다.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통성명하는 걸 잊어버려서, 조금 늦게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됐다.


"¿What's your name?"

"I'm Nacho"


자기 이름이 나쵸라는 거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멕시코에서 나쵸를 만나다니, 처음 만난 일본 사람이 제 이름은 스시에요, 하는 거랑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거슨 순전히 나의 무지에서 온 해프닝이었지만..)


웃으며 진짜냐고 물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다고 했다. 그렇다. 유쾌한 아르헨티나 가이, 그의 이름은 나쵸 곤잘레스. 우리는 나중에 페이스북을 교환했는데 정말 Nacho Gonzales라고 쓰여 있었다. (곤잘레스라는 성마저 너무 전형적인 것 아니겠는가)


그는 아르헨티나 사람이지만 일 때문에 멕시코 다른 지역에 살고 있고 휴가차 놀러 온 것이었다. 그는 스페인어도, 영어도 완벽해서 의사소통도 수월했다. 밤이 되면 스탠드를 켜놓고 각자 맥주를 마시면서 노트북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과달라하라에서 찍은 사진을 같이 보며 놀기도 하고, 각자가 좋아하는 위스키랑 와인도 추천해주기도 했다.


밤에 위스키 사러 갔다 오며 덤(?)으로 구경하고 온 성당. @Templo Expiatorio del Santísimo Sacramento
"나도 그거 찍었는데!" 근교인 Tlaquebaque에 각자 다녀왔는데 같은 가게 같은 위치에서 찍어왔던 사진.



아르헨티나식 스페인어


어느 날엔 리셉션 직원과 셋이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 처음엔 여행 정보를 얻으려고 리셉션에 갔다. 그런데 어쩌다 나쵸가 합류하면서 수다판이 벌어졌다. 전날 밤 나쵸가 나의 스페인어 공책을 봐서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연장선이 이어졌다.


아르헨티나식 스페인어는 다른 나라의 스페인어와 특별히 구분될 만큼 다르다. 문법도 조금 더 복잡하고, 억양도 개성이 강하다. 스페인식 스페인어와 중남미식 스페인어도 다르긴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정말 독특하다. 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궁금해하는 나를 위해, 멕시코 네이티브와 아르헨티나 네이티브가 번갈아가며 자기네 억양을 들려줬는데 그게 너무 재밌었다.


글로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같은 말을 해도 멕시코는 무척 부드럽고 상냥하게 하고, 아르헨티나는 거칠고 투박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받을 때나 안내를 해줄 때도 그렇다며 각자 현지 대표가 실감나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특유의 손동작(그게 제일 중요하다)도 알려줬는데,

그것은 마법의 제스처였다. 강조할 때, 화날 때 등등 거의 모든 상황에 활용될 수 있는 만능 제스처. 나쵸 덕분에 나도 습득 완료!



게이? 아줌마?


첫날밤 나에게 소개한 대로 나쵸는 게이였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게이를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첫 만남부터 게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좀 낯설고 신기했다. 친구들은 혹시 2인실이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게이라고 말해준 게 아니냐고 의심했는데, 그는 진짜 게이였다.


나쵸는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고 친화력도 정말 좋았는데, 그 때문에 그가 있는 자리는 항상 화기애애했다. 한바탕 소녀들의 꺄르르 웃음소리가 들리고 나쵸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쟤들은 내가 게이인걸 모른다며 하-하-하- 크고 유쾌하게 웃어제끼기도 했다. 사실 나쵸는 약간 아줌마(?) 같았다.


저녁때는 각자 요리를 하며 재료를 빌려주기도 했다. 나는 면이 남고 그는 소스가 남아서 딱이었다. 과달라하라에서는 대형마트에서 재료를 사 와서 요리를 해 먹었다. 주방에 서서 스파게티를 후루룩 먹고 있으니 나쵸가 날 발견하고 또 하-하-하- 웃으며 너 지금 되게 배고프구나! 하고 지나갔다.


아, 나쵸의 주된 쇼핑 항목은 조리 도구였는데, 여행까지 와서 무거운 도구들을 마구마구 모았다. 어느 날은 특이한 절구 같은 걸 사 오기도 했다. 가방에서 도구들을 꺼내며 보여주는데 무슨 마법상자처럼 끝없이 나와서 나는 또 웃음이 터졌다.


어떤 날은 코트를 진짜 싸게 샀다고 자랑하며 "이걸 얼마에 샀냐면~" 하며 쇼핑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우리는 같이 번갈아가며 거울 앞에서 나쵸의 새 옷으로 패션쇼(?)를 했다. 물론 나쵸 옷은 나에게 너무 컸지만.. 그래도 보기에 비해 가볍고 따뜻해서 잘 샀다며 아낌없이 칭찬을 해 주었다. 우리는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주고받으며 우리끼리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나쵸는 그 옷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날 오후에 밖에 나갔다 들어왔을 때도 거울 앞에서 혼자 요리조리 핏을 보고 있다가 나에게 들켜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큭큭)



슬랭 교환


나쵸는 항상 노트북을 끼고 있었는데 직업이 컴퓨터에 관련된 것이었다. (사실 설명해줬는데 못 알아들었다..) 그는 나에게 괜찮은 정액권 영화 사이트를 추천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검색의 신이었다. 말만 하면 척척, 거의 매크로 수준이었다.


우리는 어쩌다가 슬랭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여행 중 폰에 스페인어를 메모하고 다녔는데 그중에 나도 뜻 모르고 쓴 슬랭 같은 게 끼여있었던 모양이다. 그 단어의 틀린 부분을 바르게(?) 고쳐주고 나쵸가 자주 쓰는 슬랭인 'Cabrón'에 대해서도 함께 탐구(?)했다. 그러다 그는 한국어 슬랭은 어떤 게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갑자기 어느 수준으로 알려줘야 하나 고민이 됐다.


그런데 망설이는 순간 나쵸가 금방 뚝딱뚝딱 검색하더니 정말 실용적인(?) 한국어 슬랭을 몇 개를 찾아냈다. 나에게 정확한 발음을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그가 찾은 것은 정말 리얼한 '욕'이어서 차마 정확히 발음해 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 언어를 배우면서 예쁜 말만 배우는 게 좋지만, 여행을 다니면서 실제로 내가 그 욕을 알아야 알아듣기 때문에(!) 가끔 나는 슬랭도 같이 메모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택시 안에서 알아들은 적도 있다.)



스페인어 공부의 자세


나쵸는 그것 말고도 언어 공부에 대해 진짜 조언다운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내 노트는 조그만 글씨로 가득 차 있었는데 독학하던 시절에 정리하거나 연습하던 것이었다. 얘기를 하다가 나는 문법이 복잡해서 어렵다고 말했다. 나쵸는 맞다고 동의해주면서 나에게 정말 유용한 조언을 한 마디 남겨주었다.


"가정법 조건법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과거, 현재, 미래. 그것만 알면 돼!"



친구



"하-하-하-"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제스처가 떠오른다. 외국에서 사람을 만날 때 좋은 점은 첫 만남 때 나이로 상하를 결정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쵸와도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쵸 외에도 외국에서 만난 모든 친구들이 그렇다. 우리는 나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지만 나보다 나이가 10살 이상 많다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편하게 느끼진 못했을 것이다.


나쵸는 헤어질 때 수면안대도 선물해 주고 캐리어도 들어주며 도와주었다. 그는 언젠가 아르헨티나에 놀러 오라고 했다. 자기한테는 날짜만 말해주면 된다고.



재미있는 나쵸 아저씨. 다음에 아르헨티나에 놀러 갈게요.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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