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그 안의 비밀

Campeche#4

by 세라

성벽 사이의

영화제


아브라암과 바닷가 해질녘 풍경을 한참 구경한 뒤, 다시 센뜨로 쪽으로 돌아왔다. 아브라암이 성벽 쪽에서 영화제를 한다고 해서 같이 가 보니, 정말로 어느 한 거리 사이로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Campeche Film Festival(=Cine entre murallas, Festival de cine)


와! 아는 사람만 찾을 수 있는 (9와 4분의 3번 승강장 같은) 거대한 공간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낮동안 파스텔톤 색감으로 가득했던 콜로니얼 거리는,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서정적인 멜로디로 충만해 있었다. 성벽 사이의 영화(Cine entre murallas)라니, 마치 비밀스럽게 열리는 축제 같달까. 영화제는 1년에 한 번, 약 일주일 동안 열리는 것으로 아브라암이 아니었다면 나는 코앞에 있는 행운을 놓칠 뻔했다.


우리도 빈자리를 찾아 앉아 잠시 영화를 감상했다. 단편영화들이 쭉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사실 영화의 내용을 제대로 알고 봤다기보다는 그냥 축제 분위기를 즐겼던 것 같다.

깜페체는 영화를 사랑하는 도시 중 하나다. 그래서 영화제는 매 해 지역 작가들의 단편영화 시리즈를 반영하고, 멕시코 남동쪽의 풍성한 영화 산업을 알리기 위해 거리에서 펼쳐진다.

Campeche es una ciudad que ama el cine, por eso año con año el festival de cine toma las calles y avenidas para proyectar series de cortometrajes de autores locales y dar a conocer la riqueza del sureste mexicano para la industria cinematográfica.


상기된 분위기 속에서 샤우팅(?)으로 대화를 주고받던 우리는, 잠시 영화를 감상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성벽 위의


영화 스크린 바로 뒤는 낮에 혼자 들렀던 성벽이었다. 하루 안에, 이번엔 아브라암과 같이 다시 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영영 성벽 위의 낭만이라는 걸 모르게 됐을지도 모른다.



성벽 위의 좁은 통로에는 낡은 중에도 어딘가 녹슬지 않은 옛 분위기가 서려 있어 왠지 모를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브라암과 한 줄로 서서 총총 걸어가 보니, 어두운 길 끝에 종 하나가 담담하게 걸려 있었다. 성벽은 여기까지라는 듯 길이 뚝 끊겼다. 예고 없는 단절은 악장과 악장 사이의 쉼표 같았다. 우리는 2층 높이에서도 고스란히 한눈에 들어오는 도시와 성당, 바다를 바라보다 걸음을 돌렸다.


ㅡ낮에도 여기 왔었는데, 이런 곳인지 완전 몰랐어!

ㅡ나도, 그때는 정말 덥기만 했다구.





성벽 위의

칵테일


막다른 길에서 다시 돌아오는데 시야 저편에서 보랏빛이 어른거렸다. 우리는 컬러가 이끄는 곳으로 홀리듯 걸어갔다. 그랬더니 뜻밖에 또 다른 축제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ㅡ여기 진짜 예쁘다!


거기에는 분명 바닷가 요새 도시인 깜페체만이 연출할 수 있는 낭만이 있었다. 도시를 에워싼 벽들은 아름다운 축제들을 비밀스럽게 숨겨놓고 있는 것 같았다. 밖에서 볼 땐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는데, 분명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다니. 그야말로 비밀 그 안의 비밀이었다. 마치 외로운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행성 같았다.



잔 끝에 묻어있는 소금이 뭇별처럼 반짝이는 낮은 성벽 위. 보랏빛에 신비롭게 빛나는 칵테일들은 심지어 모두 무료였다. 우리는 이곳에 우연히 초대된 손님이었다. 깜페체 사람들은 우리에게 상냥하게 잔을 건넸다.


아브라암과 테이블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셰프가 취한 듯한 얼굴로 테이블을 돌며 까나페를 돌렸다. 산타할아버지처럼 푸근한 얼굴의 셰프는 여행자들만큼이나 축제를 즐기는 듯했다.


이곳은 깜페체 필름 페스티벌과 함께 성벽 위에 열린 또다른 축제의 공간이었다. 자세히 보니 같은 티를 입은 축제 자원봉사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칵테일 바가 정리되는 동안 아브라암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나는 혼자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낮에 갈 곳이 없어 방황했던 것이 생각나서 혹시나 한번 더 물어보았다.


ㅡ 깜페체에 오면 어딜 가야 하나요?

ㅡ..아마도 성벽?

ㅡ성벽이랑 바닷가 말고는 없나요?

ㅡ음... 사실 여긴 아주 작은 도시예요!


그렇구나, 오전에 피곤한 상태로 갈 곳이 없어 방황했던 건, 영 컨디션 탓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물찾기 하듯 하나씩 깜페체의 매력을 알아가면서, 조금씩 이 도시에 빠져들고 있었다. 축제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더 빛을 발했다. 오직 깜페체에서만 가능한이었다.





우리는 곧 보랏빛 성벽 위를 떠나 깜페체의 메인 거리로 돌아왔다. 바닷가를 걷고, 영화제를 보고, 성벽을 구경하고, 그다음은... 역시 먹방이었다! 깜페체에 들른다면 누구나 한 번쯤 가게 될, 바들이 모여 있는 59번 거리의 야외 테이블을 오늘의 마지막 코스로 정했다. 갑자기 맥주 대결(?)이 펼쳐졌다.


아브라암은 나에게 이것도 보여주고 저것도 보여주고 싶었는지 첫 주문에 다섯 종류의 맥주를 시키고 말았다. 푸핫, 그 모습은 이 색깔도 예쁘고 저 색깔도 예뻐서 같은 옷을 다 사 버린 내 모습과 겹쳐졌다. 그래도 다행히(?) 우린 둘 다 잘 마셨는데, 덕분에 다양한 맥주를 맛볼 수 있었다.(하지만 미첼라다는 다시 마셔봐도 적응이 안 된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재밌었는지, 옆 테이블 사람이 자발적으로 "사진 찍어 줄까요?" 말을 걸어오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또 재밌는 것은 이 분들이 나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브라암을 상대로 스페인어 연습도 많이 했는데, 대화가 깊어질 때는 점점 못 알아듣는 부분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Despacio, por favor(천천히 말해줘)"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모를 땐 아브라암의 폰으로 검색을 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ㅡ남미 쪽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들이랑 (외모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아, 아, 그런데 이런 이론이 있다고 들었어, 예를 들면 페루 인디언들의 뿌리가 아시아에서 왔다는 거야, 그래서 그런가, 얼굴색만 다르지 왠지 비슷한 느낌이 있어….


아브라암은 영어를 전혀 못 했고, 아시아 친구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래도 똑똑하게 한글 자판을 다운로드받아 설정해서 내가 검색할 수 있게 자기 폰을 빌려주었다. 그는 실제로 동갑이기도 했고, 서로 언어는 부족했지만 대화가 잘 통했다.



낮에 식당에서 아브라암을 두 번째 우연히 만났을 때, '왜 저 남자가 나한테 느끼한 미소를 보내는 거지?'라고 생각했을 때만 해도 오늘 이렇게 많은 반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브라암과 친구가 된 것은 물론, 모르고 지나갈 뻔한 깜페체의 축제들과 성벽 몽환적인 낭만을 알게 되었다. 아브라암과의 인연은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 같았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 이틀처럼 느껴지는 하루, 혼자여서 생길 수 있는 외로움과 즐거움이 동시에 있었던 날이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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