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암,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해?

Campeche#5

by 세라


혼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맥주를 들이켜서인지 몸이 급속도로 나른해지고 있었다. 늦은 밤이었다.


아브라암과의 만남이 둘째 날까지 이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우리는 실컷 놀고 헤어진 뒤 메신저로 사진을 주고받았는데, 그가 근처에 가볼만한 곳이 있다며 괜찮으면 다음날 오전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정보도 부족하고 길 찾기도 어려운 나에게 그가 동행해준다면 당연히 더 좋은 거였지만, 이때는 술기운 때문인지 갑자기 게으름병이 도져서 늦잠을 자게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아브라암: 9시?

나: 음…

아브라암: 10시?

나: 음……




결국 11시. 부스스 눈을 뜨니 이미 해가 중천에 걸린 시간이었다. 깜페체에서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아브라암에게 연락을 해 보니, 괜찮다며 자기도 지금 막 일어났다고 했다. 그가 충분한 시간을 준 덕에, 우리는 둘째 날에 유적지에 함께 가게 되었다. 아브라암은 출장 기간에 주어진 주말을 즐기려고 이미 정보를 많이 찾아본 것 같았다. 그만 믿고 따라나섰다.



날이 밝으니 역시 날씨는 다시 푹푹 찌고 있었다. 거리를 나서자마자 지쳐가기 시작했다. 강렬한 날것의 햇빛이 도시 전체를 무한히 밝혔다. 버스를 기다리며 가만히 서 있을 때 볕이 얼마나 따갑던지. 햇볕이 이렇게까지 셀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인 정도였다. 버스 안엔 현지 사람이 꽉 차 있어 거의 카오스다. 다행히 맨 뒷자리가 하나 비어서 앉을 수 있었는데, 아브라암은 자리가 나도 앉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매너 있게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El Fuerte de San Miguel


El Fuerte de San Miguel에 가려면 언덕을 조금 걸어 올라가야다. 그런데 막상 올라보니 생각보다 한참이었다. 헥헥거리며 더위에 벌겋게 타오른 얼굴로 아브라암에게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ㅡ아브라암,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해? 나 지금부터 5분이 한계일 것 같아... (죽는소리)


좀 더 올라가야 한다며 미안해하는 그. (자기가 가자고 했으니까)


ㅡ그래..? 그럼 난 호텔로 돌아갈게, 안녕. Adiós!!!!


이러면서 자꾸 뒤돌아 집에 가는 척을 몇 번이나 했던 것 같다. 착한 아브라암은 내가 이럴 때마다 계속 당황했는데 그 반응이 재밌어서 계속 했던 것 같다.(미안..) 하지만 꾸역꾸역 올라가서 도착할 무렵엔 농담을 할 힘도 없었다. 그가 조금만 더 힘내라고 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브라암을 수없이 괴롭힌 뒤에 드디어 도착한 곳! El Fuerte de San Miguel이다.


El Fuerte de San Miguel은 해적의 공격으로부터 San Francisco de Campeche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17~18세기에 구축된 요새다. 18세기 말까지 영국군이 벨리스(멕시코 유카탄 반도 남동쪽에 붙어 있는 아주 작은 나라)를 점령하고 있을 때, 유카탄 반도 전체를 정복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한다.

El Fuerte de San Miguel는 이 도시의 가장 대표적인 요새다. 라틴아메리카 전체에서 가장 견고한 방어 요새인 '산 호세'와 붙어있다. 도시에서 바다 쪽으로 바람이 부는 Buena vista 언덕 위에 지어졌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곳이자 해적을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이었다.



방어 요새 위로 올라가니 해적을 잘 관찰할 수 있을만한 위치라는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나무들도 적절히 요새를 가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 위는 엄청나게 덥고 뜨거웠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바로 아래층에 있는 박물관에서 마야 유적들을 구경했다. 아래 있는 박물관의 이름은 'Museo Arqueológico de Campeche(깜페체 고고학 박물관)'. 마야 문명의 흔적이 담긴 점토와 조각 등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아브라암은 생각보다 진지한 태도로 하나하나 오래 보았다. 스페인 침략 뒤 한순간 파괴돼 버렸다는 마야 문명. 이곳은 바로 마야 문명의 중심지라는 중앙아메리카, 그중에서도 더 중심지인 유카탄 반도였던 것이다.


마야력 1달의 20일 기호


천천히 둘러보는 아브라암을 기다리며 내가 재밌게 본 것은 마야 달력이었다. 마야인들은 근대 이전 가장 정확한 달력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야력의 1년은 18개월과 추가적인 5일로 이루어지는데, 1개월은 20일이었다고 한다. 위 사진은 그 20일을 표기하는 스무 개의 기호다. 몇몇 기호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는지 '(?)'라고 쓰여 있는 부분도 있었다.



여기서 또 (혼자) 웃겼던 건, 한 번은 내가 아브라암한테 설명판을 읽어달라고 했는데, (아브라암은 멕시코시티 사람이니까, 가장 서울말(?) 같은 멕시코 억양일 것 같아서 그냥 궁금했다) 마치 국어 시간에 호명을 받고 지문을 읽는 학생처럼 정자세로 서서 그 긴긴 설명판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다 읽었더랬다.. 아브라암은 진정 FM인 것인가. 나도 끊을 타이밍을 찾지 못해 자응답기 같은 아브라암의 낭독을 끝까지 듣고 서 있었다.



"지금이야!"


우리는 박물관에서 기다리다가 구름이 지나갈 때를 맞춰 다시 올라갔다. 아브라암이 가르쳐 준 조금이나마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전경을 둘러보며 서로 기념사진도 찍어주었다. 그런데 나는 땀에 쩔은 생쥐 꼴이었는데... 왜 때문에 아브라암은 이렇게 산뜻하고 멀쩡한 거지!? (이때 아브라암의 폰에서 나의 굴욕사진들을 지워버렸어야 했는데..) 멕시코 사람들은 역시 더위에 대한 남다른 유전자가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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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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