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ña de Bernal(뻬냐 데 베르날). 세계에서 3번째로 크다는 돌산이 있는 마을이다. 페루 마추픽추에 갔을 때 우뚝하고 거친 역사 속으로 끝없이 올라가는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아담한 마을 뒷동산을 시선 닿는 대로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뭇 이국적인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까페떼리아에 앉아 돌산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쉽게 그려졌다. 그래서일까, 세계에서 3번째로 크다는 수식어가 퍽이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Querétaro의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혼자 이곳에 왔다. 40분 정도면 올 수 있는 가까운 마을이어서 반나절 동안 시간을 보내다 갈 생각이었다. 버스에서 제대로 못 내릴까 봐 기사 아저씨에게 Peña de Bernal에 꼭 내려달라고 당부하고 눈에 잘 띄도록 맨 앞줄에 앉았다. 그럼에도 아저씨는 여기에 날 내려주는 걸 깜빡하고 5분 정도 더 가다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한참을 다시 후진해서 내려주었다. 정확하게 딱딱 시간 맞춰 사는 한국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중남미 여행에선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이곳에선 타임 테이블보다 사람을 더 믿어야 한다. 버스에서 내리자 Peña de Bernal이라는 돌산을 끼고 있는 마을, Villa de San Sebastián의 붉은 표지판이 마을의 수문장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햇빛은 쨍쨍했고, 거리는 한적했다. 막상 가 보면 길 잃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소담한 마을이다. 돌산이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는 이 영역의 시간을 느리게 흘러가도록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베르날의 소우주 같달까. 그 때문에 이곳은 모험가뿐만 아니라, 느린 하루를 보내고 싶은 여행자들에게도 좋은 곳이었다. 혹은 모험을 하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쉬다 가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산에서 마을을 내려다 본 모습
마을을 굽어보는 돌산, 베르날은 아래에서 올려다볼 땐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같은 존재였다. 그 모습이 아무런 꾸밈없는 벌거숭이 돌산이어서, 더욱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자연 속의 선지자 같았다. "네가 가고 있는 그 길이 맞아"라고 말해주는,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산들의 할아버지 산 같았다.
Templo de San Sebastián Bernal
마을을 걸으며 사진을 찍다 보니 시간이 훌훌 흘러갔다. 이곳은 영화 촬영지로도 인기 많은 마을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들른 날은 관광객들조차 몇 없는 한산한 날이었다. 사실 방문해볼 만한 박물관도 있었지만 하필 내가 간 날 일주일에 한 번 휴관하는 날이었다. 다른 날에 간다면 베르날의 역사나 이 마을 주제의 사진, 영화 작품 등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 (El Museo de la máscara, el Museo del Cine Nacional “Rosalio Solano”, el Museo de sitio “Capilla de Ánimas” 등등.)
마을을 걷다 보니 베르날을 1~2시간 정도 올라갈 수 있는 투어 부스들이 곳곳에 있었다. 모두 비슷했는데 한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곳 같았고, 부스가 있는 곳마다 버스가 정착하는 곳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실컷 보낸 뒤 더 이상 할 게 없을 때쯤, 그중 한 곳에서 투어를 예약했다. 께레따로로 돌아가는 버스가 생각보다 일찍 끊겼기 때문에 투어를 마치는 대로 바로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는 걸로 약속을 받았다.
칸칸이 연결한 장난감 같은 지게차를 타고 덜컹덜컹 베르날을 오르기 시작! 6명 정도의 멤버가 모였는데, 대부분 미국이나 남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가이드 분의 설명은 스페인어로 진행되었다. 그중 휴스턴에서 온 미국 여자분이 종종 설명을 영어로 번역해서 알려줬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스페인어로 알아들은 부분만 번역해주곤 했다. 그래도 그녀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인간의 힘이 닿을 수 없는 자연에는 늘 신비로운 전설이 가득하다. 베르날에 따르는 소문 중 하나는 산꼭대기에 UFO가 온다는 것이었다. 여행자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나는 좋았다. 외계인도 이곳에서 마을을 한번 내려다보고, 파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갔을까.
멕시코스러운 풍경을 따라 우리는 다 함께 위로 위로 올라갔다. 얼굴 정면으로 흙먼지들이 휘날렸지만, 사람들은 마냥 즐거워했다. 언젠가 이곳이 마그마가 들끓는 활화산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건 투박하게 마른 바위들뿐. 이제는 지게차의 모터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인 세상. 역사의 흔적만큼이나 무상하다.
선인장이 마르면 이렇게 된다.
꼭대기 근처에 다다르자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이 생명수라도 되는 듯, 사람들은 물을 마시거나 페트병에 담았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두 손에 물을 받아 마셨다. 세상일이 이렇게 믿는 대로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매력적으로 변신하는 것은 여행의 묘미였다.
돌조각을 가져가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무게를 차지하는 게 싫어서 줍지 않았는데, 내려오는 길에 멤버 중 한 분이 한 조각을 건네주셔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그 돌멩이를 가지고 다니다 한국에 오기 전 멕시코 땅에 살포시 내려놓고 왔다.
베르날의 주문: 시간아, 천천히 흘러라!
아주 나중에, 팍팍한 일상 속에서 깊은 피곤이 어깨를 짓누르는 날에, 돌산 베르날의 바라보며 햇살 비치는 모닝커피를 마시는 따뜻한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