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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놓아주지 않던 도시

Puebla#1 아마도 나를 기억하게 될 걸?

by 세라

누구나 여행을 하며 사랑에 빠진 도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도시가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있을까?


멕시코 전역을 여행하며 떠나기 아쉬운 도시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놓아주지 않은 도시가 있었다. 바로 Puebla다.




첫 만남


일정 때문에 멕시코에 도착한 뒤 여독을 풀 새도 없이 바로 Puebla로 향했다. 퇴사한 지 3일 만에, 그것도 아침에 막 모든 이삿짐을 보내고 정산 처리를 하자마자 정신없이 비행기를 타고 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Puebla에 짐을 풀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아직은 홀가분함이 실감조차 되지 않았다.



Puebla라는 도시가 지닌 여러 가지 매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첫인상은 썩 좋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장장 이틀 만에 멕시코에 도착했고, 보조가방이 터져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며 온 데다, 유심칩을 샀지만 자꾸 버가 에러가 다. 도시 간 이동하는 버스를 타는데도 공항처럼 이미 터져 있는 짐부터 신분증까지 모두 보여줘야 했고, 자동차 매연은 지독했고…… 뿐만 아니라 도착한 호스텔에는 마실 수 있는 물조차 없었으며, 긴 비행과 노숙의 여파로 피곤은 극에 달해 거의 울고 싶은 수준이었다.


일단 도착하자마자,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 가져온 인스턴트 음식을 데우지도 못하고 먹어치웠다. 급한 허기를 달랜 뒤에는 마실 것과 가능하면 터진 가방을 대체할 만한 것을 사고 싶어 밖으로 나갔다.



말하자면, 소개팅을 하는데 비를 쫄딱 맞은 채로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상대방이 멋진 사람이 나온대야 곱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람들이 자꾸만 낯선 동양인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이 불편했다. 편의점에서 요거트를 사고 숟가락을 물어보는데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나에게 집중하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길에서 갑자기 인사말을 건네는 사람도 무서웠다. 호스텔을 잘 못 골라서인지 도시에 대한 인상이 더 나빴다.


이때는 몰랐다. 삭막하게만 보이던 허름한 거리들이 그토록 다시 돌아보게 될 길이 될지, 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들이 내가 찾게 될 정도로 다정하고 흥미롭게 느껴질지, 처음에는 정녕 몰랐다.


그래도, 한번 더 만나 봐


아마도 Puebla에 대한 나의 첫 평가는 너무 '가혹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날이 밝고 다시 만난 도시의 모습은 훨씬 활기 차 보였다. 이른 아침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여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고 있었다. 센뜨로에 우뚝 선 대성당도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130페소에 저렴하게 보조 가방 쇼핑도 성공했다. 터져서 엉망이 되어버린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아마도, 도시는 나를 이따금씩 달래주려는 듯했다.


La Catedral Basílica de Puebla/ (건축시작)1575~


성당에 대한 식견이 별로 없었던 나는 이곳이 얼마나 넓고 높은지 가늠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가장 좋은 것을 봐버린 것이다. 그도 그런 것이 나는 딱히 종교도 없는 데다, 이곳이 첫 도시여서 축적된 데이터가 0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Puebla의 대성당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손꼽히는 수준의 훌륭한 건축물이었고, 사실 Puebla 자체가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천사의 도시'였다.


La companía templo del Espíritu Santo/ 1583~
아마도 나를 기억하게 될 걸?


들어가도 될까 망설이던 참에 옆을 지나던 노부부를 바라봤고,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온화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도시는 이 노부부처럼 은근한 멋이 있었다. 멕시코에서 가장 오래된 이 도시에게 뿔난 여행자 하나 다스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나를 기억하게 될 걸?'하며 껄껄, 웃는 듯했다.


Templo de Santo Domingo/ 1571~


얼핏 생각해도 Puebla에서 이차저차 들린 성당은 다섯 군데가 넘는다. 여행 중 돌아봤던 수많은 성당 가운데 기억에 남는 몇 안 되는 성당도 이곳에 있다. 개인적으로는 금으로 장식된 Santo domingo 성당의 분위기가 단연 압도적이었는데, 미사시간이 겹쳐 사진촬영이 금지되었고 황금이 뿜어내는 웅장함을 사진으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다. 실은 Puebla에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서야 진가를 깨달았는데, 겉으로 볼 때는 번화한 거리 중간에 살짝 묻혀 있었다. 이후 다른 도시에서도 내부가 금으로 장식된 성당들을 많이 봤지만, Puebla의 Santo domingo가 최고였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나는 Puebla를 한 세 번쯤은 떠났거나 떠나려 했었다. 처음에는 그저 경유 목적으로 들른 도시였기 때문이다. 멕시코를 짧게 여행하는 사람들은 Puebla에 하루나 이틀쯤 들리거나 아예 생략하기도 한다. 수도인 멕시코시티와의 접근성은 좋은 편이지만, 여행자들의 짧은 일정에서 우선순위에 오르기에는 조금 평범하다. 위로 멕시코시티와 그 근교만 해도 Teotihuacán(떼오띠우아깐) 같은 거대한 피라미드 유적지나 Taxco(따스꼬), Xochimilco(소치밀꼬) 같은 거리가 더 가까운 매력적인 지역들이 많이 있고, 또한 멕시코에는 Cancún(깐꾼)이라는 강력한 휴양 도시가 있으며, Guanajuato(과나후아또) 같은 콜로니얼 도시는 현지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을 정도로 도시 전체가 아기자기하다.


La Biblioteca Palafoxiana/ 1646년에 세워진 멕시코 첫 공공도서관, 유네스코 세계유산.
San pedro museo de arte


하지만 Puebla는 성당의 도시, 박물관의 도시, 대학의 도시로서 볼만한 곳이 정말 많다. 박물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도시가 될 거라 확신한다. 수준 높은 건축, 종교, 예술, 교육, 역사, 문화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도시다. 치안도 나쁘지 않다. 나처럼 최악의 컨디션이 아니라면, 멕시코시티에 머물면서 짧게 다녀오기에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나 역시 스쳐가는 여행자로서 서너 정도일 거 생각했다. 이미 내 리스트에 있는 다른 도시들만으로도 일정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렇게 대표적인 곳을 훑어보며 도시의 분위기를 느껴보았다.


인연의 시작


나와 Puebla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끝'인 줄 알았던 인연의 '시작'.


거리와 성당, 박물관, 미술관 외에도 할 말이 너무나 많다.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 쏘깔로, 음식, 시장, 야경, 다양한 테마의 거리들…… 세 번, 네 번, 어쩌다 보니 인연이 닿아 돌아오고 또 돌아오면서 매번 이전에는 놓쳤던 새로운 것들을 만났고, 때로는 궂은 날씨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꼭 사람과의 관계처럼, 시간을 공유하며 차근차근 추억을 쌓은 Puebla. 여행자로서 이렇게 깊은 인연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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