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일단 글 쓰는 건 고사하고, 나는 살아가는 동안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까. 언젠가 눈이 나빠지거나 병에 걸리게 되어 읽는 자유를 빼앗기게 되면, 그때가 되면 나는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살아갈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불행한 일을 미리 상상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지만, 자꾸만 건강히 읽고 쓸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강박이 든다.
약속 없는 내 주말 일상이란 이렇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종이책을 읽다가 태블릿으로 e-book을 보다가 폰으로 웹소설을 읽다가 스피커로 오디오북을 듣다가 다시 폰으로 웹툰을 보다가…… 이 모든 것들을 펼쳐놓고 내키는 대로 번갈아가며 읽는다. 읽는 속도는 느린데 좋아하는 작가는 많고, 문장 하나에도 잘 반한다.(욕심쟁이다.) 가끔 영화를 보거나 피아노를 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읽고 쓴다. 운동, 단체 사교 모임 등의 활동적인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럴 일이 생겨도 최대한 멀리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에너지가 굉장히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어느 순간부터는 술을 마시며 책을 읽는 버릇까지 생겼다. 책술, 이것 역시 나쁜 버릇인 걸 알지만 약간 취한 상태에서 감정에 몰입하여 읽고 쓰는 상태가 좋아 책인지 술인지 둘 다인지에 대해 거의 중독되다시피 되고 말았다. (중독에 매우 취약한 인간이다.) 그 와중에 회사는 새벽 출근이라 매일 강제로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거짓말 같이 규칙적인 현실과 취한 듯한 몽환의 생활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던 중 아토피성 알러지라는 판정을 받았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체질이 바뀔 수도 있다고 했다. 스테로이드 연고와 알약을 지속적으로 사용했지만 10개월 동안 낫지 않아 한의원을 찾았다. 2시간이 넘는 상담 끝에 한의사는 내가 오래 누적된 피로 때문에 잠에서 잘 못 깨어나는(각성을 잘 못하는) 상태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항상 눈과 머리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어서 열이 오르고, 그래서 얼굴, 특히 눈가가 건조해진다는 것이었다. 마치 용한 점집에 갔다 온 것처럼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하고 있을 때 내 뇌의 한켠은 깊은 피로에 쩔어 자고 있고, 그나마 겨우 깨어 있는 시간은 읽고 쓰는 데 쏟아붓고 있다는 말 아닌가? 이제는 말없는 육제조차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회사를 그만두거나(!) 책 읽기와 술 마시기를 끊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달 정도 한약을 복용한 지금, 나는 회사도 책도 술도 끊지 못했다. 책술은 먹고사는 일만큼이나 그만두기 힘들었다. 그나마 술은 좀 줄이긴 했지만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가장 큰 부분이었다. 그러니 더욱더 그런 생각이 진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남은 생동안 얼마나 더 읽고 쓸 수 있을까.' 읽고 쓰는 것을 참지 못하는 의지박약과, 읽고 쓰고 싶다는 생에 임박한 의지. 도대체 무엇이 과다한 것이고 무엇이 박약한 것일까.
어려서는 별 대가 없이도 넘치도록 주어지던 설렘과 기대 같은 것들이 어른이 되면 좀처럼 가져보기 힘든 이유는 모든 게 결정되어버린 삶을 살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 벌 수 있는 돈,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수 등이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으면 대개 정해져 버린다. 장차 여행은 몇 나라나 더 가볼 수 있고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으며 내 힘으로 마련할 수 있는 집의 크기는 어느 정도 일지가 점점 계산 가능한 수치로 뚜렷해지는 것이다. 남은 생이 보인다고나 할까. 허나 아무리 어른의 삶이 그런 것이라고는 해도 모든 것이 예상 가능한 채로 몇십 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가혹하다, 고 생각하기에 나는 노력하기로 했다. 너무 빨리 결정지어진 채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석원, 『언제 들어도 좋은 말』
언제까지고 '결정되지 않은 삶'을 위해 깨어있겠다는 이석원 작가님의 이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얼마나 공감했는지 모른다. 시간의 유한함에 대한 씁쓸하고도 다급한 인식과 손에 잡힐 듯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한계(특히 글쓰기)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기와 의지.
내가 가진 시간의 양이 목숨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고 있다는 말은 내 목숨의 일부를 내주고 있다는 의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을 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도 내 목숨이 사용된다. 그래서 인생에서 시간은 어느 것에 더 목숨을 소비하고 사용했느냐의 결과를 말한다.
-림태주,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림태주 작가님의 에세이 대목에서는 내가 가진 시간의 양이 내게 남은 읽고 쓸 수 있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내게 목숨같이 아까운 것, 기꺼이 목숨을 소비해 하고 싶은 것, 아픈 몸을 가누어서라도 몰입하고 싶은 것.
그것이 내게는 모두 글이었다. 읽고 쓰는 일의 유효 기간. 아니, 유효 시간. 아니, 유효 생. 이런 강박을 느끼지 않는 유일한 시간은 읽고 쓰는 시간이다. 술을 마시면 더 좋고. 그 유효 생을 늘리기 위해 나는 모순적으로 생을 더 많이 소비해 읽고 쓴다. 아토피는 차도를 보이지 않는데, 세 가지 일상(일, 책, 술)을 그만두는 건 너무 어려워서 나는 그나마 할 수 있는 한 일찍 자려고 노력한다. 에고는 좀 쉬어 가라고, 좀 내려놓으라고 말하는데, 셀프는 더 생생히 깨어 있길, 더 많이 잠들어 있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