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xicocity_Chapultepec
거기를 걸어갔다고요?
앞에서 나는 멕시코시티의 사기, 택시, 치안 등에 대해 썼다. 하지만 그 외에 겪은 시행착오들은 이곳의 환경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나의 실수들이었다. 특히 길(!) 때문에 멕시코시티에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첫날에는 메인 성당 뒤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위험한 구역으로 가게 된 것, 두 번째는 Hidalgo역 부근에서 Chapultepec까지 도보 가능한 거리라고 착각해 걸어오다가 길까지 잃어 고생한 것, 세 번째는 드디어 종이 지도를 버리고 '구글 맵'을 사용하려고 안심하고 호기롭게 나왔다가 Coyoacan에 도착하자마자 폰을 깨뜨려서 비 오는 날 고생한 것 등등이다.
멕시코시티에서 차뿔떼뻭(Chapultepec)을 무식할 만큼 구석구석 보고 온 날, 호스텔에서 만난 여행자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거기를 걸어갔다고요?" 그리고 "거기를 다 봤다고요?"
아름다운 차뿔떼뻭 성을 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거의 4시간 동안이나 걸은 것 같다. 정말 미련하게도 걸었다. 그래서 이날 기억에 남는 것은 엄청나게 많이 본 것과 엄청나게 많이 걸은 것이다. 중간에 택시나 지하철을 탈 법도 했는데, 왠지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 왠지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은, 이유모를 자신감과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잘못된 믿음의 책임은 모두 죄 없는 나의 두 다리가 짊어져야 했다.
한 가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호스텔에서 이야기를 나눈 여행자들 중에 의외로 나처럼 차뿔떼뻭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걸로 잘못 생각해서 고생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우리는 저녁때 각자의 고생담을 공유했는데, 걸은 시간으로는 내가 1등(?)이었다. 푸하핫. 2등을 한 어느 일본인 여자와 맥주를 사서 파티를 벌였던 기억이.. (역시 꼴찌끼리는 통하는 걸?)
서울에서 치열하게 직장 생활을 하며 살았으면서도 어째서 나는 대도시들이 익숙해지지 않는지 잘 모르겠다. 여행을 통해 깨닫게 된 것 중 하나지만 나는 대도시에만 오면 무척 방황한다는 것. 마치 강남역 지하상가에 처음으로 갔던 날 특정 지하철 출구를 찾는 것이 대단한 미션으로 느껴졌던 압박과 비슷했다. 사람들이 하나의 끝없는 모션처럼 오가고, 비슷한 길들이 모든 방향으로 펼쳐져 있고, 온갖 소음이 섞여 분간할 수 없고..
하지만 Chapultepec 공원 일대는 복잡한 도시 속에서도 초록의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과연 멕시코시티의 허파라 불릴 만했다. 대도시 기피증이 있는 나에게도 이 도시가 매력으로 다가오기를 바라며, 하루 동안 본 것을 정리해 본다.
Chapultepec 숲에 도착하니 귀여운 다람쥐가 날 반겨준다. 멕시코에 와서 항상 마시던 보라색 Jamaica 주스를 한 손에 들고 숲을 거닐었다. 나무 사이 숲길로 기분 좋은 여유가 흘렀다.
차뿔떼뻭은 '인류학 박물관'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다. 인류학 박물관은 하루 종일 봐도 다 볼 수 없다고 하는데, 이 공원 자체만 해도 숲, 호수, 여러 개의 박물관, 성, 시장, 동물원까지, 엄청나게 큰 규모였다. 이날 나는 인류학 박물관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차뿔떼뻭의 규모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천천히 보다 보니 하루가 다 지나갔다. 확실한 건, 차뿔떼뻭을 제대로 보고 간다면 멕시코에 대한 역사·예술·문화체험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걸음 닿는 대로 따라가 보니 호수가 나왔다. 호숫가에서 주스를 다 마실 때까지 사람들을 구경했다. 놀이동산처럼 가족, 친구, 연인들이 가득했다. 숲길 중간에 박물관이나 갤러리가 나오면 전시회를 둘러보기도 했다.
시장에서는 선글라스를 하나 샀다. 80페소(5000원 정도)에 샀는데, 알고 보니 나한테는 제일 비싼 라인들만 권해준 거였다. 돌아다니면서 보니 2-30페소 짜리도 많았다. 하지만 택시비 사기에 비하면 크게 억울하지는 않아서 시장 물건 중에는 최고급(?)으로 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또 엉뚱하게 이곳 거리 노점상들에서 한국 옛날 아이돌들 브로마이드도 파는 것도 봤다.
동물원에서는 아이들 사이에 껴서 같이 동물을 구경했는데, 부모님들이 아이들한테 해주는 설명이 내 스페인어 수준에 딱이었다 ㅎㅎ 나도 그 설명을 엿들으며 동물 이름을 공부해 보았다. 새로운 이름을 알아가고 매칭시켜 보는 것은 나름 재미있었다.
요약해서 썼지만 숲길, 전시회, 호수, 시장, 동물원을 둘러보는 데만 해도 반나절 넘게 걸렸다. 여행자들 대부분 동물원은 생략하는 듯했다. 그래도 나는 귀여운 아이들과 인사도 주고받으면서 판다도 보고 하마도 보고, 멍해지는 시간이 좋았다. 사실 우리는 서로 구경하기도 했는데(?) 아이들이 날 보고 신기해하며 "엄마 저기 봐봐, Japonesa가 있어!" "어, 방금 China였어!"라고 하는 걸 몇 번 들었다. 이 꼬맹이들이! 그래서 나도 대놓고 그 똘망똘망한 꼬맹이들을 구경했고, 우리는 동물을 보다가도 서로를 쳐다 보기를 반복했다(..ㅋㅋ)
하지만 내 시간을 통째로 빼앗긴 곳이 있었으니..
Museo del Caracol이라는 박물관이었다. 차뿔떼뻭 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꽤 멀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조그만 열차를 타고 올라갔다. 나는 뚜벅이 컨셉을 고수하며 꿋꿋이 걸어 올라갔는데, 언덕 중간쯤에 이 역사 갤러리가 있었다. 건물에는 '자유를 위해 투쟁한 멕시코 마을'이라고 쓰여 있었다. 'Caracol'은 달팽이라는 뜻이다. 박물관의 입구 쪽이 나선형으로 돌아 내려가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이것은 산 둘레를 돌아 차뿔떼뻭 성으로 올라가는 언덕처럼 (조화를 이루게 하려고)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인류학 박물관에 가지 않은 대신, 65페소를 내고 달팽이 박물관(?) 내부에 들어가 보았다. 전쟁과 역사에 대해 시대순으로 아주 상세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천천히 읽으면서 돌고 있었는데 내가 하도 자세히 보고 있자, 옆에 같이 보던 멕시코 친구들이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ㅡ이거 다 이해했어?
ㅡ음, 그럭저럭? ¡más o menos!
그러자 그녀들 중 영어에 능한 한 명이 나에게 마치 가이드처럼 설명해 주었다. 동선을 따라 겹칠 때마다 종종 설명을 해 주었다. 정말 친절하다! 나도 다음에 서울 어디선가 외국인들을 만나면 도움을 줘야겠다!
이날 그 친구 덕분에 달팽이 박물관에서 나도 한 마리 달팽이가 되어(?) 정말 느리고 꼼꼼하게 봤다. 그래도 뿌듯했던 건, 13개 섹션으로 나눠진, 섹션에 따라 방대한 코멘트와 자료, 모형, 사진들이 전시된 것들을 정독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다 이해한 건 아니지만) 멕시코 독립의 역사와 공화국의 탄생, 미국과의 전쟁, 개혁, 복원, 혁명, 헌법 등등…… 멕시코는 우리 못지않게 전쟁의 아픔이 많은 나라다. 2시간 넘게 이곳에서 역사 클래스 한 과정을 수료하고 나온 듯하다!
차뿔떼뻭 성에 도착한 것은 더위가 가시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였다. 입장하는데 날 학생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들여보내 줬다. 뭐지..? 역시 허술하다! (학생 아닌데..)
차뿔떼뻭 성은 아름다웠다. 곳곳에 있는 보라색 꽃의 화분들이 성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성 안에는 과거 황제의 생활 모습뿐만 아니라 온갖 문화재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달팽이 박물관을 너무 열심히 봐서 이곳에서는 체력이 떨어져 버렸는데.. 멕시코에서는 정말 박물관 너머 더 큰 박물관의 연속이었다. 멕시코에 있는 동안 늘 느낀 거지만 이들은 자신의 문화를 굉장히 사랑하는 것 같다. 심지어 침략자들이 자신들의 땅에 일궈놓은 굴욕과 찬탈의 흔적까지도 소중히 보존하고 있고, 그것을 또 다른 자신들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와는 좀 달라 보였다. 나는 그 점이 생소하고 신기했다.
멕시코에서는 어느 박물관을 가나 Mural art를 실컷 즐길 수 있는데, 이곳에서 또한 벽화의 정수를 엿볼 수 있었다. 역사와 예술, 그리고 화가의 개성이 담긴 멕시코의 Mural art에 대해서 더 자세히 보고 싶었는데, 이곳에서는 이미 너무 체력이 방전된 상태였다.
뒤쪽으로 쭉 이어지는 화원에서는 도시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아 활기가 가득했다.
이 뒤로 고생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맨 처음 쓴 대로, 나는 다시 Hidalgo역 근처로 돌아오기까지 4시간이나 걸렸다! 너무나 지쳐버린 나는, 그제서야 점심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아..! 이날 밤 허기는 피곤보다 강렬했노라. 호스텔 근처 간이 포장마차 같은 데 서서 타코(따꼬)를 와구와구 먹었는데, 그 맛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순수하게 그 타코에 대한 기억 때문에 멕시코에 다시 가고 싶기도 하다. 양파, 라임, 각종 소스 등등 반찬처럼 원하는 대로 셀프로 추가 재료를 넣을 수도 있었다. 이게 단 6페소라니!(360원) 그 자리에서 다이렉트로 6개나 먹으며 옆에 서서 먹는 멕시코 사람과 대화도 나눴는데 그 사람이 오이를 추가하며, 내게 반찬(?) 리필법을 가르쳐 줬다. 타코에 오이가 완전 짜장면에 단무지 느낌이었다. 그렇게 처음 만난 메히까노와 꼬레아나는 맨손으로 마구 퍼먹으며 전투적으로 '하나 더요!'를 외치는 재미있는 풍경을 연출했다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건 이 타코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그렇게 정신없이 먹고 나서야 좀 살 것 같았다.
차뿔떼뻭을 제대로 보려면 최소한 하루 이상 잡고 봐야 할 것 같다. 마지막에 도착한 차뿔떼뻭 성에 가장 화려한 문화재들이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시간과 체력 안배를 잘 해서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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