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혼잣말

#일기

by 세라

비가 오는 날 자취방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게 좋다. 펼쳐진 책 앞에 우두커니 앉아 몇 문장 읽지도 못했는데 시야가 흐릿해지며 하루가 저물어버리는 저릿한 감각도.


비 때문인지, 몇 달 동안 줄곧 물속에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철렁, 와르르, 쓸쓸쓸, 쏟아지는 비가 그런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쏴아아, 샤샤샤, 파슬파슬, 그런 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빗줄기 사이로 뛰어들어가 볼까? 그러나 곧 충동을 접는다. 떨어지는, 부딪치는, 깨어지는 것들이 다 한참 가물었던 사람 마음 같아서, 함부로 헤치고 지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종종 뛰어들었던 것 같은데.


어제 두 시간 동안 휘갈겨 썼던 글을 지웠다. 다시 읽어보니 나는 정말이지, 너무나 불만이 많은 인간 같았다. (나는 불만이 많은 인간이 싫다.) 사실은 어제 어렵게 일정을 조정해서 나갈 준비를 끝마친 약속이 직전에 취소되었고 그래서 급속도로 허전하고 예민하고 배가 고파졌을 뿐인데, 나는 몸이 아프면 다 끝이라는 둥, 나는 도전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는 둥, 난잡하게 들뜬 글만 써 올렸던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숨기다가 돌리다가 엉뚱한 데서 터뜨려 버리는 꽉 막힌 버릇은 내 글마저 좀먹고 있다. 그러지 말자, 제발 좀.


나는 친구들에게서 작가스럽다, 예술가 같다, 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사실 그런 성격은 내가 속한 집단 내지 세상과 불화하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다. 일하는 동안에는 퇴근 후, 주말에 집중적으로 내 '문학적 자아'를 허용하곤 했다. 그런데 반년 동안 쉬면서, 말하자면 나는 오직 문학적 자아로만 살았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나는 사회적 자아로 재빠르게 스위칭하던 순발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 아찔하다. 그동안 잘못 생각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따위의 고민은 문학적 자아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기에.


귀가 먹먹했다. 혹시 나, 반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건 아니겠지? 다시 한번 빗속에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떨어지는, 부딪치는, 깨어지는, 저 하염없는 액체 세상 속으로.


누군가가 떠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누구든,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내 인사를 받아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누구의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으며,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검은 비만 내렸다. 철철철, 자박자박, 사람의 발자국 같은 소리를 내면서. 하루도 철렁 저물었다. 나는 갑자기 반년 동안 한 번도 말을 해 본 적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빗속에는 나처럼, 반년동안 말을 하지 않은 존재들이 떨어지고, 부딪치고, 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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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