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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Jul 14. 2024

복숭아와 플루트

장맛비가 쏟아지는 날 복숭아를 먹었다. 언젠가 당신은 나에게 복숭아를 선물해 준 적 있었다. 침묵과 비관에 빠져 있던 나를 스스로 밖으로 나가게 하여 이슬 맺힌 토란잎을 보게 하고 재래시장을 통과하여 복숭아를 사 오게 한 당신. 밖으로 나가 봐. 아직 빛이 남아 있어. 당신은 나에게 복숭아가 나오는 얇은 책을 선물했었다. 물컹한 복숭아를 베어 무는 순간 여름의 가장 달콤한 부분이 지나가는 거라고 알려준 것은 모두 당신이었다.


처음으로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글을 쓰는 것 같다. 어쩌면 처음이 아닌지도 모른다. 당신을 떠올릴 때마다 수천 번 수만 번 나는 당신의 편이었다. 무한 차례 당신의 입장이 될 때마다 나는 차례 길 잃은 나를 버려두고 떠나야 으며 그때마다 처음, 이라고 적었다. 처음으로, 그 책을 펼쳤다. 서로 등을 기대고 선 수많은 책들 사이에 가녀린 한 권. 단 한 권. 나는 책의 앞섶을 한 장 한 장 열어보면서 처음으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글을 쓰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글을 먼저 쓴 것은 언제나 당신이었다. 사랑하지 않음마저 나는 전적으로 당신의 입장이었다.


당신은 나의 플루트 연주를 들은 적 있었다. 세상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그 연주를 당신이 들었다. 연주를 계속하라고 부추긴 것은 당신이었다. 네 연주는 뭔가 달라. 너에게는 특별한 무언 있어. 우리는 한여름날 밤 흔들리는 육교 위에서 복숭아 향기를 맡았고 플루트 선율을 들었고. 나는 복숭아의 유일한 독자로서 당신은 플루트의 유일한 청자로서 우습게도 자꾸만 마주치던 날들에 내가 얼마나 당신이 없는 글을 쓰고 싶었는지 당신은…… 알았어? 당신이라니, 마치 내 글 속에 당신이 정말로 있다는 듯이 당신도 그렇게…… 믿었어?


처음으로 펼친 그 책에는 한 번도 복숭아가 등장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사과와 팬케이크, 체리 샤베트가 올려져 있는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 책을 읽었다고 믿었던 걸까. 지금도 당신은 어느 풀밭에서 복숭아 바구니를 들고 걷고 있다고. 나는 비 내리는 여기서 녹슨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고. 없는 향기를. 없는 선율을. 그리하여 쓸수록 텅 빈 글을. 이 글은 누가 얼마나 오랫동안 써 온 걸까. 정말로 글을 썼다고 믿었던 걸까.




2024.07.07. 비 오는 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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