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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품은 하얀 밤

Taxco#3 낮과 밤의 반전

by 세라


블랙이 모든 색들을 한데 품어 안을 때, 화이트는 모든 색을 남김없이 투과시킨다.



그러나 온 세상이 어둠 깊이 침전해 갈 때ㅡ



꽉 찬 블랙은 무(無)가 되고, 화이트만이 순수하게 존재한다.



Todo es blanco, pero todo tiene la luz adentro.




Taxco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멕시코시티의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하면 금방이라 당일 근교 여행으로도 많이 오지만, Puebla에서 돌아오는 바람에 하루 반나절이 지나버린 것이다. Taxco의 하얀 집들과 귀여운 자동차 풍경에 한눈에 반한 나는 우선 호스텔로 향했다. 작은 마을이라 어느 곳이든 거리는 가까웠지만, 돌길이 많아서 캐리어를 끌고 가기에는 힘들었다.



터미널에서 나와서 그냥 길에서 지나다니는 택시 하나를 잡아 탔다. 여기 택시들은 구조가 독특했는데, 문을 열면 쇠고리가 연결되어 있고 (카메라 캡 홀더 고리처럼) 자세히 보면 뒷좌석은 아예 문이 없다. 대신 앞자리가 충분히 넓어서 캐리어와 함께 들어가 앉았다. 장난감 자동차 같은 미니 택시는 좁은 골목길 사이를 요리조리 달려 금세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다.


호스텔에서는 일본인 여자를 한 명 만났는데 나를 보고는 같은 동양인이라며 무척 반가워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여행자답게 까무잡잡한 피부, 이미 중남미 스타일로 무장한 차림새. 그녀는 키도 크고 목소리도 걸걸했는데, 성격도 이미지만큼 시원시원했다. 다음날 다른 곳으로 떠난다며 자기가 보던 팜플렛을 주기도 했다. 여행 중에 일본인을 여러 번 만났는데 어느 나라 사람이든 사람따라 다른 것 같다. 무례한 한국인도, 무례한 일본인도, 또 그 반대도 모두 만났다.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이지만 막상 중남미에서 만나면 같은 문화권이라 할 만큼 통하는 점이 많다.



한참 동안 버스 안에 있었던 나는 환기가 필요했다. Puebla에서부터 좋아하게 된 Teleférico를 타러 갈 생각이었다. 골목길 탐험은 내일로 미루고, 대관람차처럼 느린 케이블카를 타고 도시의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려 했다. 갈 수 있는 방법은 많았지만 해가 질까 봐 다시 한번 택시를 탔다.



택시는 길을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갔다. 산기슭에 위치한 이 마을은 오르막길이 무척 가파르고 험했다. 대부분은 꼼비(Combi)를 이용했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그래 봤자 30대 초반) 무척 말이 많았다. 멕시코인들의 못 말리는 사교성도 이미 익숙했다.


그런데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Teleférico는 이미 운영이 끝나 있었다. 출발 전에 호스텔에서 물어봤을 때는 운영 중일 거라 했는데, 이날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일찍 닫아버렸다. 나의 시선에 원이 담겨 있었던 걸까. 택시 기사는 자기도 몰랐다며 계속 변명을 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150페소에 왔던 길을 포함해서 전망대에 갔다가 다시 호스텔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좀 아쉬웠다. 그의 제안은 꽤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마을 크기와 물가를 어림잡아 본능적으로 비싼 가격이라는 것을 눈치챈 나는, 딜을 시도했다. 꼼비 가격이 13페소에 터미널에서 호스텔까지의 택시비도 20~25페소 정도밖에 안됐으니 말이다. 택시 안에서 수다를 떨 때와 달리 우리는 기싸움(?)을 시작했다. 100페소를 제시했는데, 결론적으로는 120페소까지 깎았다. 여전히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대신 이날 나름 만족스러운 가이드를 해 주었다.


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


산꼭대기 전망대(Mirador)의 예수상(Cristo Monumental)은 Taxco 어디에서나 보이는데, 막상 차를 타고 올라가니 꽤나 멀고 으슥한 산길이었다. 가는 동안에 계속 함께 수다를 떨었다. 아, 멕시코의 택시 아저씨들은 매번 사적인 질문을 한다. 특히 이 질문을 절대 빠뜨리지 않는다.


-남자친구 있어요?

-아니요.

-멕시코 남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그런데 만약 남자친구가 있다고 대답하면 대화의 흐름은 이런 식이다.


-남자친구 있어요?

-네.

-그럼 '멕시코 남자친구'는 어때요?


이 질문들은 이미 답정너다.



우리는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제 친구가 Guerrero주는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인가요?

-하! 여기가 위험하다고요? 그 친구 어디 살아요?

-Puebla에 사는 친구가 그랬어요.

-전혀 아니에요, 전혀! 여기 관광객이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 동네는 안전해요.


친구는 몇 달 전 Guerrero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약과 카르텔 관련 뉴스도 심심찮게 있었다. 관광객들이 멕시코를 무서워하는 이유다. Taxco는 Guerrero주에 있지만, 인기 많은 관광도시이기 때문에 치안은 좋은 편이다.


-근데 여기 진짜 길 있는 거 맞아요?

-하하하, 걱정 마세요. 여기가 빠른 길이에요.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점점 어두컴컴해졌다. 급기야 빛이 하나도 없어져서 어디선가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분위기가 으스스했다. 괜히 그 택시 기사도 무서워졌다. 그는 "걱정 마, Amiga(친구)"라며 안심시키려 애썼지만 나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고 말수는 줄어갔다. 누가 봐도 긴장한 것이 역력했다.



긴장감이 극에 달하기 직전, 예수상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괜한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 택시 기사는 같이 놀러 온 사람처럼 한구석에 주차를 하고 계속 안내를 해 주었다.



아름다운 Taxco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의 두 눈은 마치 광각렌즈가 된 것 같았다. 쏘깔로의 성당도 선명히 보였다. 아직 이 도시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하얀 집'과 '하얀 자동차' 뿐이었기에, 어둠 속의 빛들은 왠지 더 신비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 도시는 낮에는 온통 하얗고, 밤에는 온통 빛나는구나. 하얀 집들은 '색깔' 대신 '빛'을 품었구나. 낮에도 하얗고, 밤에도 하얗구나.



-아저씨 집은 어디에 있어요?

-저어기, 저쪽에 살고 있어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Taxco에서만 살았다는 그는, 이곳이 좋다고 했다. 그의 집은 시야의 왼쪽 언저리에 있었다. 같이 Teleférico의 위치도 짚어보며 마을의 생김새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그는 또 예수상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주겠다고 했다. 관광객들은 이곳에 오면 으레 팔을 벌리고 있는 예수상의 포즈를 따라 취하며 기념사진을 찍어 간다. 그는 포즈를 알려주며 열정적으로 로우 앵글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내 DSLR로는 밤에 찍기는 꽤 어려울 텐데.. 아무리 작동법을 알려줘도 현지인이 찍어주는 사진이 제대로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기대는 전혀 없었다. 나는 어려울 거라고 말했지만 그는 할 수 있다며 자신만만했다.



역시나!


예상은 했지만 이 사진을 확인하며 너무 웃겨서 킬킬 웃었다. 그도 따라서 웃었다.


이곳을 보고 난 뒤에도 그는 산 중턱의 사진 찍기 좋은 지점에서 중간중간 차를 세우고 구경을 시켜 주었다. 덕분에 누구보다 Taxco의 야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와 거의 친구가 되었다.



산 중턱에서 찍은 야경. 위의 사진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각도가 조금 더 아래쪽이다.



그는 계속 나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난감하게도 사진은 아까의 그 수준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나는 촬영 위치와 카메라의 모든 옵션을 수동 설정해준 뒤 그 자리에 그를 세웠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오로지 버튼만 누르는 것이었다.



사실 조금 흔들렸는데, 그 이상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에게 아주 잘했다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암, 이 정도면 훌륭하지.



그는 약속대로 다시 쏘깔로 쪽으로 데려다주었다. 마을 가운데로 들어와 보니 밤의 축제가 한창이다. 자, 이제 저 하얀 축제 속으로 들어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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