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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빨래 후 잦아드는 행복

Taxco#4 손빨래, 그리고 아침햇살

by 세라

내가 여행 중 알게 된 새로운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손빨래다. 그동안 바쁘다는 것을 핑계 삼아 꼭 손빨래를 해야 한다는 옷도 세탁기에 뭉뚱그려 넣거나, 세탁소에 맡겨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장기 여행을 하다 보면 손빨래를 해야 할 일이 반드시 생긴다.


멕시코에도 세탁기가 있긴 했지만, 가정집이나 호스텔에서 빨래판 모양으로 생긴 돌판대 같은 것을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정말 '빨래'만 하느라 찍어둔 사진은 없다.) 수도꼭지가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손빨래를 하기에 최적이었다. Taxco에서 묵었던 호스텔은 내가 손에 꼽는 마음에 드는 곳 중 하나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호스텔 직원에게 혹시 빨래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냐고 물었다. 직원은 옥상에 올라가 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따라 올라가 계단 끝 마지막 층의 문을 열자, 눈 앞에 환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



... 와우!


마치 Taxco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했다. 산구름 아래로 하얀 집과 붉은 판자지붕이 가득하고, 아직 희석되지 않은 아침 공기가 공간 사이사이를 채웠다. 테라스에 기대 서서 잠시 풍경을 감상한 후, 팔을 걷어붙였다. 즐거운 노동을 시작해 볼까나.


한쪽 그늘 아래에는 다부진 돌판이 있었다. 보통은 화장실 세면대에서 빨래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탁 트인 옥상에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그림 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말이다.


돌판 옆에는 Jabón(하본)이라고 부르는 가루 세제가 넉넉히 준비되어 있었다. 가져온 빨래 비누가 있었지만 이 세제를 좀 섞어 넣으니 거품이 풍성하게 났다.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돌판에 옷을 비벼대니 기분 좋은 리듬감이 귓가를 가득 채웠다. 빨래를 하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없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요리를 하면서 행복을 느낀 적은 종종 있었다. 야채를 썰고 다듬으며 나도 모르게 평온한 상태에 도달하곤 했다. 그 순간들을 좋아했다. 일부러 노력해도 잘 떨쳐지지 않는 잡념들은, 소소한 반복 노동 속에서 잠들 때의 의식처럼 미스테리하게 사라졌다.


'빨래'는 어쩔 수 없고 귀찮은 노동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아침 햇살 아래 손빨래를 한다건, 한여름밤 야영만큼이나 낭만적인 거구나. 무엇보다도 강력한 해방감을 선사해 주는구나.



한참 동안 빨래를 하고 난 후, 문득 고개를 들어 풍경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온 세상이 고요했다. 햇살이 내리쬐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세상 같았다.


헹구고 물기를 짜 낸 옷들을 탈탈 털어 빨랫줄에 널었다. 시원하게 젖은 옷에 따뜻한 볕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옷을 널고 바라보니 그 옷을 입고 돌아다니던 나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세상을 떠돌며 묻혀 온 얼룩과, 마음이 움츠러들 때마다 만들어진 주름도 여기서 다 정화되리라. 불순한 것들은 잊혀져라. 구겨진 것들은 반듯해져라. 손빨래란, 마치 내가 나를 위로하는 하나의 힐링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이날 아침을 내 여행에서의 중요한 순간 중 하나로 꼽는다. 알람 시계가 아닌 내 스스로 일어나 맞이한 아침, 볕바른 옥상, 풍요로운 게으름, 그리고 접으면 부서질 듯 바삭바삭 잘 마르는 옷들까지.


마음이 깨끗해진 그 순간, 온 세상이 하얀 집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은 신의 장난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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