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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란, 여행은.. 게으름

Taxco#5 시장 산책

by 세라


돌이켜보면 나의 여행은 정말 게으름의 연속이었다. 많은 시간동안 머릿속이 텅 빈 상태로 살았다. 남들보다 더 길게 머무르면서, 사실은 남들보다 더 적게 봤다. 놓치고 온 중요한 유적지들이 많아서 아쉬움도 크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정도로 게으른 날들이 너무 좋았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었다. 그야말로 유유자적이었다. 일하고 공부하며 꽉 차게 살아오느라 내 안에 얼마나 잠재적 게으름(?)이 많은지 알지 못했는데, 비로소 나의 진짜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삶은 계란, 여행은 게으름.



오전에 빨래를 하고 시장으로 나왔다. 채소와 과일, 그리고 Papaya를 사서 비닐봉지들을 주렁주렁 들고 시장을 돌아다녔다. Taxco의 시장도 다른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 시장에서 그 지역의 과일을 사 먹어 보는 것은 여행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다.



딱히 맛집을 찾아다니지도 않았다. 걷다 보니 출출해져서 시장에 있는 아무 가게에 들어가서 오믈렛을 주문했다. 멕시코 음식들은 언제나 푸짐해서 좋다. 양이 모자랄 일이 없다. 이 작은 가게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정성껏 맞이해 주셨다.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멕시코에서 이 아저씨 인형(?)을 엄청 자주 볼 수 있었는데, 특이하게 '약국' 앞마다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나중에는 익숙해졌는데,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시선강탈이었다. 여기서 나를 붙잡고 같이 춤을 추려고 해서 한바탕 큰 웃음을 주었다. 이 약국 아저씨, 정말 멕시코스럽다.



Taxco의 매력 중 하나는 좁은 골목길. 시장에도 곳곳에 미로 같은 골목길이 가득하다. 길을 잃든 말든 발걸음 닿는 대로 가다 보면 어느새 또 아는 길로 연결된다.



햇살 좋은 시간 잠에서 깨어나 빨래를 하고, 시장을 산책하고, 브런치를 먹고, 좋아하는 사진을 찍고.. 그것 뿐인데 이미 반나절이 지나 있다. 별로 한 게 없는데 다시 솔솔 잠이 온다. 또다시 낮잠을 청한다.



소소하고 게으른 시간들, 이것을 시간 낭비라 할 수 있을까? 극단적인 게으름 속에 풍덩 빠져서 그 게으름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 지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 안의 모든 마음을 존중해 주었다. 귓가에 노래가 들려오면 그 노래는래서 좋고, 저 노래는 저래서 좋았다. 이것은 이래서 예뻤다. 저것은 저래서 예뻤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바람이 멈추면 따라 멈추었다. 내가 주인공이든 배경이든 어떤 것도 대수가 아니었다. 내 안에 천천히 여유가 깃드는 시간 동안 나는 절로 순해졌다. 어떤 가시 돋친 말도 내 안을 걸림 없이 통과해 갔다. 그리고 나는, 누구의 말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게으른 날들을 보낼 수 있어서


참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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