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xco#6 친구와 꿈에 대한 사색
골목길 참 예쁘다!
여행을 하다 보면 마을 특유의 분위기가 잊고 있던 생각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Taxco의 매력에 한참 빠져있던 그때, 나는 친구 한 명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아마도 이곳의 좁다랗고 정감가는 골목길 때문이었을까? 고향 바닷가의 사라진 오솔길에 대해 늘 이야기하는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에게 이곳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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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스물 두살 때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녀는 나보다 더 영화에 관심이 많은 영화과 수업을 듣는 타과 학생이었다. 나는 영화 자체보다는 글쓰기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어쨌는 우리는 둘 다 창작을 좋아했고, 열정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녀와 나눴던 대화는 종잡을 수 없이 광범위했다. 정치, 사회, 과학, 문학, 예술, 뿐만 아니라 인생 개똥 철학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다. 어느 날 나는 그녀와 신나게 수다를 떨고 난 뒤 우리 대화의 키워드를 간단히 메모해 뒀었다. 이날 우린 사라진 것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다에서 멸치를 잡으며 자식들을 길러낸 그녀의 부모님 이야기, 마을이 개발되며 사라진 바닷가 오솔길, 파란 하늘을 가려버린 방파제, 어렸을 때 자주 갔던 또랑, 소금쟁이, 개구리알, 그 시절 오가며 길에서 따먹곤 했던 사루비아의 꿀, 사과맛 대추나무, 뽕나무, 진달래, 메뚜기, 곱등이, 잠자리를 괴롭히는 못된 남자애들, 물이 마르기 전 풍성했던 계곡, 그곳에서 뛰놀던 추억, 100원짜리 떡볶이, 50원짜리 풀빵, 쫄쫄이 튀김, 쪽자 할아버지, 메달게임, 고무줄놀이, 손톱을 물들였던 봉숭아꽃, 내가 키웠던 백일홍 화분, 부모님이 낚시터에서 바로 잡아서 끓여 주던 매운탕…….
우리는 둘 다 바다가 있는 도시에서 자랐다. 친구의 집은 말 그대로 바닷가 바로 앞이었지만, 우리 집은 바다를 보려면 차를 타고 조금 나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바다를 가슴에 품고 자란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나의 열정이 불꽃처럼 화르르 타오르는 것이었다면, 그녀는 꺼지지 않고 온기를 유지하는 온돌 같았다. 큰 결정도 성큼성큼 내려버려서 뒷감당이 더 문제인 나에 비해, 그녀는 시작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이렇게 다른 성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서로의 유일한 친구였다.
친구는 내가 아주 다른 세계에 있어서, 왠지 먼 별나라에 가버린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발걸음 닿는 대로 세계를 돌아다녔고, 어느덧 신비로운 이 도시에 와 있었다. 밤이 되면 모든 색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하얀 집들만 남아 밤을 밝히는, 제 안의 투명함으로 홀로 반짝이는 어린왕자같은 도시였다. 어쩌면 나는 이름 모를 소행성 위에서 밝고 하얀 별을 향해 끝없이 걷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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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많던 우리에게 졸업 후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무엇이든 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에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차마 마주하지도 못하는 시기를 보냈고, 때로는 열정의 심지가 영원히 꺼져버린 듯 감흥 없는 시기를 보냈다. 치열한 경쟁 사회는 우리의 시간을, 의식을, 꿈을, 차례로 집어삼켰다. 그래서 때로는 꿈을 앓았다는 사실조차 어릴 적 치른 홍역처럼 무감각해졌다. 그냥 좁은 방에서 벗어나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고, 편하게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 켠을 차지했다.
노력, 적성 < 재능 ?
때로는 노력이나 적성보다 재능이 훨씬 중요해 보였다. 학교나 사회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이 '감각 있는 사람'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2%의 재능이 아마추어와 프로를 갈라놓고, 꿈과 현실의 간극을 하늘과 땅만큼 영영 갈라놓는 것처럼 보였다. 혹자는 나에게 그냥 운이 최고라는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노력, 적성, 재능 < 운 ?
밤이 되자 광장에는 별이 빛나고, 사람들은 별나무 아래서 춤을 추고, 나는 그 속에서 친구를 생각했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은 꿈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 꿈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지지자이며,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꿈도 가끔 속절없이 무너졌다. 우리는 처음에는 타의에 의해 무너졌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주객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나를 가두어 놓고, 그곳에서 다시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어디선가 또 다른 내가 지켜보며 코웃음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온 세상이 어두웠고, 눈을 뜨면 황무지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변함없이 친구의 꿈을 응원했다. 나도 역시 그녀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친구야, 넌 하고 싶은 거 다 해
Taxco의 빛이 반짝일 때마다 우리들의 단어가 요지경처럼 소용돌이쳤다. 상상 속 별나라 같은 곳에서 내가 친구를 생각하듯, 아직 사라지지 않은 하얀 꿈들도 어디선가 우리를 꿈뻑꿈뻑 지켜보고 있을까.
Taxco의 축제는 영원히 끝나지 않았다. 하루면 다 알 수 있을 것 같은 이 작은 마을에서는 매일 밤 새로운 축제가 펼쳐졌다. 오늘 다 즐기지 못하면 내일 또 즐길 수 있었다. 빛은 밤이 되면 또다시 돌아와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 그 광경은 모든 걱정과 불안을 잊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푸근한 아저씨의 엉성한 댄스에 온 세상 다 가진 자의 행복이 흘러넘쳤다. 사라진 줄 알았던 것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어릴 적의 오솔길처럼, 계곡처럼, 사루비아처럼, 대추나무처럼.
그리고 친구를 위해 기념품을 샀다. Taxco의 골목길에서 발견한 광석 공예품. Made in Taxco. 나무 한 그루가 전부인 작은 섬같기도, 우리들의 외로운 꿈같기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친구도 영국에 갔을 때 멈춰 있는 골동품 시계를 사준 적 있다.
아무래도 우린 더 많은 것을 함께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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