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500일

가방을 내려놓기만 하면 되는데

D-436

by 세라

2025. 02.16. 일. D-436


답을 찾은 것은 한참 전이었다.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내려놓기. 거기서 우리는 어디로 더 가려고 했던가. 내려놓기를 아주는 내려놓지 못한 우리는.


우리는 가고 싶었을 것이다. 언제나 어디론가 가고 있었으므로. 멈추는 법을 배운 적 없으므로. 가고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게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알겠어,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아니, 내려놓음 자체를 내려놓을 수는 없을까?


'되고 싶다' '되어야겠다' '되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어쩌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학교와 직장을 다니며 무의식적으로 훈련되어 온 공장식 사고 회로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저것 애를 쓰며 살아왔지만 결국 어떤 것도 당당하게 공표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이룬 것은 없고, 이제사 무언가에 크게 애쓸 힘도 그다지 남아있지 않으며, 나라는 인간이 최종적으로는 '별로'라는 결론에 도달해서


- 가 아니라 -


그 모든 것이 인간 자체의 본성이란 것이 때때로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한가로이 이러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 가고 싶었을까? 계속 가려 했던 것은 '진짜 나'였을까? 우리에게 남은 건강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러나 더 이상 갈 곳은 없었다. 왜냐하면 여기가 종착지였으니까. 우리는 이미 도착했다. 여기가 우리가 목표한 바로 거기다. 실은 가방을 내려놓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라고 쓴 것은, 누구나 각자에게 주어진 숙제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박한 질문을 함께 물을 수 있는 친구가 나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숲속 의자에 앉아 손으로 만두를 집어먹으며 울다가 웃다가,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고민들을 나눌 수 있는, 너와 내가 오늘 여기까지 살아 있음을 장하고 훌륭하게 여길 줄 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것을 내심으로 아는 벗이.


'맞다'도, '잘했다'도 아니다. '싫다'도 '고쳐야겠다'도 아니다. 그랬구나, 거기가 끝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 좀 더 와닿는다. 죽고 싶었든, 죽이고 싶었든,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지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을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음을 평범한 우리로서는 아주 조금 밖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2025. 02. 18. 화. D-434


일기라는 것이 원래 잡다한 아무 말이나 쓰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으로 인정 받든 아니든, 나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나의 잡생각들을 최대한 많이 기록해 두기 위해서 이런 잡스러운 글을 쓰고 있다. 매일매일 강제로라도 무언가 기록하겠다고 결심한 날에는 나를 휘어잡기도 하고, 꼭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면 나를 풀어주기도 하고…… 그때그때 통제적이거나 너그러운 내가 원하는 대로 하거나 하지 못한다. 어느 쪽이든 내가 쓴 글이 성에 차는 일은 없다. 거기까지가 끝이다. '다 왔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쓰고 싶을 때 쓰고, 쓰고 싶지 않을 때 쓰지 않는다. 죽을 날을 받아둔 사람처럼 다가올 퇴사의 날짜를 세어 가며 일기를 쓰고는 있지만, 어쩌면 퇴사와는 상관없이 즐거운 내 마음도 뻔뻔하게 고백하기 위해, 다가올 불행과는 상관없는 즐거운 마음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솔직히 미래의 나에게 약간 과시하기 위해, 그리고 나중에도 이런 식으로 순간순간을 뻔뻔하게 버티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 나는 알려진 작가가 되려는 일말의 욕심도 없다. 나는 그저 내 얘기를 쓰고 있다. 쓰고 싶으면 쓰다가, 쓰기 싫으면 말다가, 혼자 중얼거린다. 어쩌면 중얼거리는 것이 내 일기의 핵심이다. 사실은 읽기도 마찬가지다. 읽히면 읽다가, 읽히지 않으면 그만둔다. 읽었다고 여긴 책들은 알코올보다 빠르게 휘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싶은 책들은 이 세상에 굴러다니는 술통만큼 가득 남았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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