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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500일

46kg 이상의 행복

[다시, 상담일기] 5회차

by 세라

지금보다 훨씬 더 길게 썼던 5회차 상담일기를, 올리자마자 10분 만에 터치 실수로 날려버렸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다시 기록해 둔다... 눈물을 흐득흐득 흘리면서 썼던 것 같은데, 오늘은 온도가 조금 식었다. 중간중간 예전에 읽었던 책 문장들이 소록하게 떠올라서 의식의 흐름대로 기록했다. 어쩌면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과식하고 나면 후회하지 않나? 나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타이트한 기준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선생님과의 스몰 토크 중에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단 걸 깨달았다.


"퇴근 후에는 저녁을 해 먹어요?"

"저녁에는 최대한 참아요. 많이 먹으면 죄책감이 들거든요."

"죄책감이요? 왜요?"

"그건…… 제가 필요한 것 이상이잖아요. 낭비 같아요."

"그래도 밥이잖아요, 퇴근 후 고생한 나를 위해서 저녁만큼이라도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지 않나요?"

"낮에는 회사생활을 하느라 거의 매일 외식을 해요. 밥도 사 먹고 빵도 사 먹고 커피도 사 먹고…… 이미 너무 과해요. 하루에 3000원짜리 김밥 한 줄씩 사 먹으며 버텼던 백수 시절을 생각하면 펑펑 먹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정말 안 되는 거예요. 반성해야 돼요. 그건 죄짓는 거예요……."


일종의 강박증일까. 나는 46kg가 넘어가면 사치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배부르게 먹고 나면 '아, 행복하다'가 아니라, '아, 한심하다'가 먼저 튀어나온다. 그다음은 뻔하게도 나 자신을 비난하고, 통제하고, 경멸하고, 끔찍하게 혐오하는 수순이다. 마치 비계가 덕지덕지 묻은 금수 새끼를 쳐다보듯이, 나를. 너무도 비만한 나를.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거지요?"

"'나'요."


돌아돌아 다시 '나'. 이 뒤틀린 강박증에는 다가올 미래에도 가난하고 절망적인 과거가 이어지리라는, 체념과 예단과 불안과 공포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절망 다음에는 더 큰 절망. 나는 더 이상 절망고문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희망이라면 희망이었다. 내가 살아낸 시간들은 지금 내가 나를 경멸하고 혐오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미리 고통의 면역 주사를 놓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세상에게 고통 받기 전에, 내가 먼저 나에게.


풋, 그리 잘난척 하며 세상 탓 해봐야 다시 나인가. 또 나인가. 나는, 나는 너무 병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라고 쓰고 나니 문득 떠오르는 시.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최승자, <어떤 아침에는> 中 일부.




"외롭지는 않아요?"

"글쎄요…… 사실 외롭지 않은 게 뭔가 싶어요. 누가 저를 공격하고 배신하고 사기 치지만 않으면 됐어요. 단지 외롭다면, 그게 다라면, 저는 그걸로 사치스럽도록 충분해요."


그러고 보니 내게 외로움에 대해 물어봐준 사람이 얼마만인지.


나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믿어본 적이 없다, 고 썼다가 고쳐 쓴다.


나는 누군가를 언제나 너무 깊이 믿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라는 부류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렇게 판에 박은 듯한 악인이 세상에 있을 리 없지. 평상시에는 모두 착한 사람이에요, 적어도 모두 보통 사람입니다. 그러다 유사시가 되면 악인으로 돌변하니 무서운 거야. 그러니까 마음을 놓지 못해요.

p.77


난 죽기 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까 남을 믿어보고 죽고 싶어요. 학생은 그 단 한사람이 돼줄 수 있겠습니까? 돼주겠어요?

p.85


나는 그 의식 때문에 낯선 행인에게 채찍으로 맞고 싶다고까지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단계를 거치는 사이에, 남에게 맞기보다 스스로 때려야 한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때리기보다도 스스로 죽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죽은 목숨으로 여기고 살아가자고 결심했습니다.

p.278


-나쓰메 소세키, <마음> 中




믿음이 깨지고 관계가 끊어진 기억들…… 힘든 시절을 함께한, 한때 친구였고 한때 연인이었던 이들…… 한 친구가 떠올랐다. 떠올랐다는 건 거짓말이다, 최근에 나는 그를 자주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에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을 읽었는데요. 시대가 바뀌고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어쩌면 그때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독하고 질긴 가난 속에서, 한없이 외진, 외로운 곳에, 외따로이 살아가는 이 시대의 청년들이 있어요. 저와 제 친구들…… 그리고 외딴방의 희재언니. 희재언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주인공에게 문을 잠가달라고 부탁하고 자살했어요. 발견했을 땐 이미 구더기밥이 된 뒤였죠. 책을 읽는데 저는 마치 제가 그 문을 잠근 것처럼 느껴져서……."


불시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버렸다. 내 인생에도 감히 열지 못하는 문들이 있었다. 책이 그중 하나의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어느새 소설은 내 이야기로 넘어와 있었다.


"사실은 저도 너무 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마치 삶이 좋은 것처럼,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듯이, 그렇게 말해야 했다는 게……."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꺼낸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그 친구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모두 지워버리고 싶어서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차단했을 확률이 높다고 하셨다. 그 말에는 쉽게 동의되었다. "하지만, 30년에 가까운 시간은요?" 나는 매달렸던가. 그 무슨 연극적인 삶의 전도사 역할에, 나는 도취되었던가.


"그래도 그 친구는 내가 안전하다고 느낀 대상이었겠네요?"

"네, 그래도, 이 어려운 세상에서, 그나마요."

"나는 여전히 그에 대해 섭섭하고 그리운 감정들이 남아 있는 거네요?"

"……."


나는 책을 읽다가 내 감정이 건드려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책을 읽은 게 아니었다. 그건 책의 슬픔이 아니라 나의 슬픔이었다. 나는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내 이야기만 주절주절 늘어놓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인양, 책 속에 내 슬픔을 전가하며, 이책 저책 정신없이 바꿔 읽으며, 연극하듯이 독자 역할을, 내가 바로 그 미친 독서광이라면서.




"뭘 찾아?"

"네가 빠뜨린 쇠스랑."

"뭐 하려고?"

"내가 끌어내주려고…… 그러면 더 이상 네 발바닥이 안 아플 거야."

p.488


잘 가…… 나를 아껴주고 보살펴준 일 소중히 간직할게.

p.494


오랫동안 나에게 중요한 모든 운명의 모습은 희재 언니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밀물이었고 썰물이었다. 그녀는 내게 희망이었고 절망이었다. 그녀는 내게 삶이었고 죽음이었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1995년 9월 11일에.

p.510


-신경숙, <외딴방> 中




선생님은 미래가 지금까지와 같을 거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일은 이전의 흐름과 상관없이 갑자기 일어나는 거라고. (그러나 그 말은 절망에 적용했을 때에야 겨우 이해되었다) 언젠가는 살아온 모든 과정이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수긍되는 날이 온다고. (그건 너무 결과론적인 거 아닌가요?) 또한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행운을 믿고 현재를 버티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지금, 지금 내가 원하는 것들을 나에게 해주면서, 작은 만족감을 자주 느끼면서 살아갔으면 한다고. 기쁨의 경험을 모래알처럼 늘려가라고. 오늘 밤 집에 가서 술 한 잔 하고 싶다면, 충분히 그래도 된다고.


선생님은 내게 심각한 문제였던 알콜 중독마저 끝까지 옹호하고 계신다. (그 무엇보다 알콜 중독에 대한 지지는 조금 충격적이고, 거의 경이롭다.) 46kg, 그 이상의 행복을 허용하지 않은 것은 나 자신뿐.


그래, 나는 알고 있다, 폐문의 열쇠는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걸.




우리 모두에게는 어두운 면과 빛이 있고 전체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어두운 면을 전혀 보지 못해 자기애의 부식적인 힘에 구제할 길 없이 망가진 사람들을 보았다. 또한 빛을 보지못해 망가진 사람들도 보았다. 균형과 조화가 전부다.

p.111


배고픈가? 먹는다. 피곤한가? 쉰다.

무엇인가 시선을 끌면, 바라본다.

p.207


'삶의 의미가 뭐지?'라는 질문은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이 유혹적인 사과 같은 질문은 결국 속도, 씨앗도 없는 것이었다.

p.335


-마크 헤이머, <씨앗에서 먼지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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