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anajuato#7
렛잇고~ 렛잇고~ 같이 눈사람 만들래?
겨울왕국의 다정한 공주처럼 그녀는 내 방문을 두드렸다. 엘사! 나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유리구슬 같은 이름이여, 그 이름을 가진 친구를 만난 곳은 낭만이 가득한 도시, 과나후아또의 한 호스텔이었다.
도미토리룸 1층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어느 저녁이었다. 한 여행자가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방으로 들어와 내 옆쪽 1층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자기를 '엘사'라 소개한 이 멕시코 친구는 얼굴도 조그맣고 눈빛도 똘망똘망한 것이, 꼭 인형 같았다. 겨울왕국 때문에 무의식 중에 생긴 이미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엘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마치 "나는 바비인형 미미야" 아니면 "나는 헬로키티야" 라고 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재잘재잘, 수다를 잘도 떨었다.
엘사: 어, 너 스페인어 할 줄 아네?
나 : 조금, 근데 잘은 못해.
엘사: 아니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지금부터 난 너의 마에스뜨라(Maestra)야.
자신감이 떨어져 있던 나에게 대뜸 나의 스페인어 선생님이 되어 주겠다고 하는 그녀! 하핫,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대환영이다. 엘사의 고향은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인데 일 때문에 과나후아또에 왔다고 했다. 우리는 과나후아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엘사: 그 사진 여기 앞 OO 까페떼리아에서 찍은 거 아냐?
나: 우와!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알았어?
엘사: 나도 방금 들어오는 길에 그 사진 찍었거든!
엘사가 보여준 사진도 정말 같은 장소에서 찍은 거였다. 우리 호스텔은 작은 다리 아래쪽의 좁은 골목길에 있었다. 그 다리 위에는 까페떼리아의 야외 테라스가 설치돼 있었는데 밤에 특히 아름다웠다.(사진▽) 사실 호스텔에 들어오는 길에 혼자 커피를 마시러 가 보았는데, 사람이 꽉 차 있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대신 내가 정말 과나후아또스럽다고 느꼈던 창가의 화분을 사진으로 찍어두었던 것이다.
바로 앞에 있는 곳이긴 했지만 같은 것을 주목했다는 사실은 여자 둘에게 엄청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엘사는 과나후아또가 너무 예뻐서 예전부터 이 도시에서 일해보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 드디어 과나후아또에서 일을 구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호스텔에서 지내며 방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 사람이 제주도에서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그런 로망일까. 꿈을 이룬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사실 나는 우리가 있는 호스텔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녀는 이조차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비싸기만 하고, 이야기하고 쉴 수 있는 공간도 따로 없고, 방에서 와이파이도 잘 되지 않았다. 엘사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나: 이 호스텔 어떻게 생각해?
엘사: 예쁘고 좋아, 나는 만족해!
나: ...?
나중에 숙박 가격이 비싼 이유가 세르반티노 축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아있는 곳 중 가장 저렴한 데로 예약했는데도 1박에 3만 원 가까이했다. 시설도 다른 데 비해 수준 이하였다. 수도인 멕시코시티에서도 도미토리룸은 2만 원이 안 됐는데 좁아터진 크기까지, 가격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일식 레스토랑을 하는 곳이고 위층에 딸린 호스텔은 부차적으로 운영하는 곳이었다. 때문에 나는 과나후아또에서의 일정을 조금 줄였다.
하지만 엘사의 반응은 순진무구 그 자체였다. 조금 멋쩍어졌지만, 그녀는 그럴 틈도 주지 않고 생긋 웃으며 자기 침대로 얼른 와 보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엎드려서 서로의 폰 사진을 구경했다. 그녀는 내 연분홍색 갤럭시노트를 보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이런 색깔은 처음 봐!!!"를 외쳤다.
엘사는 과나후아또에서 쭉 있을 예정이었지만, 나와는 두 밤밖에 보내지 못했다. 모처럼 만나게 된 친구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나는 가지고 있던 마스크팩 두 장을 선물했다. 그런데 그녀는 한국 화장품이 진짜 좋다며, 자기도 한국 화장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파우치에서 뒤적거리며 꺼내 보이는 화장품들을 보니 에뛰드하우스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 화장품을 좋아하는 멕시코 친구를 또 만났다!
알고 보니 엘사의 친구 중 한 명이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한국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화장품은 그 친구가 사준 것이었다. 과나후아또의 거리에서 심심찮게 들려온 한국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멕시코는 먼 나라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좁다는 걸 여기까지 와서도 느낀다. 나는 엘사에게 다음에 한국에 꼭 놀러 오라고 했다. 엘사도 멕시코에 다시 오면 멕시코시티의 자기 집에서 재워주겠다고 했다. (+엘사와 이야기하다가 멕시코시티 공항에서 시내까지 택시비를 얼마나 사기당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
아침이 밝아오고 엘사는 회사로 출근할 준비를 했다. 밤 사이에 2층 침대에 다른 멕시코 사람 2명이 더 왔다. 씻고 나왔는데 친화력 대장인 엘사는 이미 그 친구들과 수다 삼매경이었다. 회사에 지각했다고 말하면서도 수다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맞다, 멕시코에서 만난 친구들이 대부분 이랬었지. 분명 새로 얻은 직장이라고 했는데 서두르는 척도 안 하다니, 나는 아직도 좀 적응이 안 된다.
이 날은 나도 과나후아또를 떠나는 날이었다. 엘사는 그 친구들과는 물론 나와도 작별 인사를 한참이나 하고서, 마침내(?) 회사로 떠났다. 진짜 웃겼던 건, 애틋한 작별 인사가 무색하게 5분 뒤에 다시 들어오더니 날씨가 춥다며 태연하게 머플러를 챙겨 나간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수다+작별인사를 진하게 하고 갔다. 정말 못 말리는 친구다.
엘사를 먼저 보내고, 나도 짐을 다 챙겨두고 나왔다. 아침에 돈키호테 박물관을 들렀다가 버스를 타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막상 가 보니 책에 나온 정보는 잘못된 것이었다. 10시에 연다고 적혀 있었는데 실제로는 12시에 오픈이었다. 버스시간이 12시 15분이어서 돈키호테 박물관은 볼 수 없었다. 일부러 이 타임으로 미뤄둔 거라 아쉬웠지만 마침 모닝커피가 먹고 싶어서 우니온 정원 옆의 스타벅스로 갔다. 주문하는 곳과 테이블 자리가 아예 다른 장소에 분리되어 있는, 조금 특이한 구조였다. 아메리카노 한 잔은 30페소로 1800원 정도였다.
전날 밤 음악 속에서 한껏 감상에 젖어있던 벤치에 앉아 있으니 꿈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기분이다. 선선한 기운에 조용한 아침. 회사에선 늘 이런 아침에 아메리카노가 위로를 해 줬었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니 아침 공기가 꽤 차가워서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추위 속에서 커피를 손난로처럼 감싸고 있다가 조심스레 한 모금 마셨다. 몸 안에 퍼져가는 따뜻한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기운이 몸 구석구석까지 빠짐없이 퍼져나가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그렇게 혼자 모닝커피를 즐기고 있는데 스타벅스 와이파이에 연결해보니 엘사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스타벅스에 있다고 하니 자기 회사가 바로 옆 건물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런 우연을 놓칠 수 없다며 잠깐 보기로 했고, 엘사가 회사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회사가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데 머플러를 다시 가지러 온 거였다..ㅋㅋ)
그러고 보니 다른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나누지 않았는데, 가 보니 과나후아또의 중심에 있는 호화스러운 호텔에서 어시스턴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엘사는 영어도 아주 유창했다. 그래서 내가 잘 모르는 스페인어도 쉽게 쉽게 설명해 주었다.
엘사는 신나서 호텔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었고, 같이 일하는 상사를 만나면 밝게 웃으며 나를 인사시켜 주기도 했다. 맨날 호스텔 도미토리에 있다 고급 호텔에 와 보니 박물관에 온 듯 눈이 즐거웠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왜 자기의 직장이 좋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갑자기 복잡하고 치열하고 시끄럽고 정신없이 바빴던 전 직장이 떠올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아서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매일 회의 때마다 내려지는 평가 또한 냉혹하기를 넘어 비인간적이었다. 너무 부정적인 건지는 몰라도 그냥 비교가 되었다. 심신이 지쳐있던 그때의 기억은 하나의 지나간 악몽이었다. 엘사처럼 버킷리스트에 아껴둔 예쁜 도시에 와서 살면서 특기를 살려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의 발랄함과 이곳의 평화로운 느낌을 나중에도 기억하고 싶다.
호텔 구조가 멋지다. 가운데는 하늘까지 뻥 뚫려 있고 그를 둘러싼 방들에는 발코니도 있어서 마치 안과 밖이 바뀐 것처럼 느껴진다. 이곳에서는 잔잔한 연주 음악이 흘러나온다.
엘사를 따라서 호텔 곳곳에 있는 그림, 조각 등 예술 작품을 구경하고 그녀의 사무실에서 잠시 쉰 뒤, 루프탑까지 올라갔다. 호텔 위치가 워낙 중심에 있어서 전망이 좋았다. 노란 과나후아또 성당과 삐삘라 기념탑도 보였다. 아침에 돈키호테 박물관에는 못 갔지만,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 새로운 각도의 과나후아또를 보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엘사는 내가 혼자 다니니까 멕시코에서 내 모습을 많이 남길 수 없다며, 계속 내 사진을 찍어주었다. 사진 속의 나는 너무 많이 입어서 늘어질 대로 늘어진 티를 입고 있다. 팔과 목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새까맣게 탔다. 나는 이 이후로도 한 달 넘게 목이 다 늘어지고 보풀이 잔뜩 일어난 티를 계속 입고 다녔지만, 자유로운 이 순간이 인생의 그 어떤 시기보다 감사하고 행복하다.
ㅡ그 누가 무어라 하든.
엘사와 헤어지고 다음 목적지까지 버스로만 5시간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버스 안에서 행적을 되짚어 보는 동안, 이미 늦었다면서도 느릿느릿 준비하며 한참을 놀다 가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직장에 친구를 데려가서 인사를 시켜주는 것, 반갑게 맞아주는 엘사의 동료들.. 다른 건 몰라도 한국의 직장 문화와 다른 것만은 확실하다. 한국에서 이만큼 바라지는 않더라도, 직장에서도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녀처럼 내 일을 좋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초심이나 열정 같은 게 식었다 해도, 조금만 더 평범해져도 충분히 좋겠다.
-그날 밤-
그날 밤 엘사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왔다. 내가 티 하나를 호스텔에 두고 갔다는 것... 아차! 이로써 돌려입는 티의 개수는 3개에서 2개로...
나는 그냥 버려도 된다고 했지만 엘사는 이 티를 꼭 보관하고 있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 놀러 가게 된다면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정말 정말 그럴 필요가 없어서 말렸지만 엘사는 이렇게 말했다.
No te preocupes. Es una excusa para verte de nuevo.
(걱정하지 마. 이건 너를 다시 보기 위한 변명이야.)
-한 달 뒤-
한 달 뒤 엘사에게서 또 한 장의 사진이 왔다.
Compré para ser gemelitas, para estar iguales cuando nos veamos. ¡Tenemos mucho por hacer! (쌍둥이가 되려고 이 옷을 샀어. 우리가 만날 때 똑같이 하고 있으려고 산 거야. 만나면 같이 할 거 진짜 많아!)
어디서 저렇게 똑같은 옷을 산 건지, 내가 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옷으로 귀여운 핑계를 만드는 귀여운 친구, 엘사.
중남미 친구들은 항상 친근함의 표시로 Amiga(친구) → Hermana(자매)→ Gemela (쌍둥이)로 넘어간다.
나도 엘사가 내 폰에 써 준 스페인어 단어로 화답해 주었다.
¡Padrísimo! (완전 좋아!!!)
+)엘사는 이후로도 나의 스페인어 마에스뜨라가 되어주었다. 비록 엘사가 열심히 도와준 시험에서 내가 듣기를 망쳐서 떨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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