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통령제는 현대 대통령 제도의 시작이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미국을 모델로 하여 자국의 대통령제를 기초했다. 미국의 대통령직은 연방 헌법의 산물이니,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에는 대통령이라는 직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통령제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미국 대통령 선거제도의 특징을 알아보기에 앞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독립과 건국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영국 사이에 ‘독립 전쟁’이 시작된 것은 1775년 4월이고, 미국인들이 독립선언서를 통해 자신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은 1776년 7월 4일이다. 1781년 10월 무렵 버지니아 주 요크타운에서 마지막 주요 전투가 끝나면서 독립전쟁은 ‘사실상’ 종료되었고, 1783년 9월 3일, 영국과 미국은 마침내 파리에서 강화 조약을 맺었다. 미국 의회는 이듬해 이 조약을 비준했다.
한편, 미국 연방 헌법이 쓰인 것은 1787년 여름이고, 목표로 했던 9개 주의 비준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은 1788년 6월이었다. 헌법에 기초한 새로운 연방 정부는 1789년 3월에 출범했으며,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1789년 4월 30일에 정식으로 취임했다. 그렇다면 독립 전쟁/독립선언과 헌법 제정/대통령제의 출범 사이 십여 년 동안에는 미국이 어떤 체제였던 것일까? 적어도 우리가 아는 형태의 대통령제는 없었다.
독립선언서(1776))와 연방 헌법(1787) 출판 당시의 사본. 헌법 사본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소장했던 것이다. | 사진: 필자
다시 독립전쟁/독립선언 시기로 돌아가 보자. 잘 알려진 대로 당시 미 대륙의 동부에는 13개의 서로 다른 영국 식민지가 위치 해 있었다. 북쪽부터 남쪽까지 차례로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메사츄세츠, 뉴 햄프셔, 로드 아일랜드, 커네티컷, 뉴욕, 펜실베니아, 뉴저지, 델라웨어, 메릴랜드, 버지니아, 노쓰 캐롤라이나, 사우쓰 캐롤라이나, 조지아.
영국과의 강화 조약이 맺어진 1783년 당시 미국 지도 | 사진 출처: The-Map-As-History.com
1774년 9월, 조지아를 제외한 열 두 식민지 대표가 식민지 모국 영국의 부당한 통치에 맞서기 위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그것이 대륙 의회(The First Continental Congress)의 시작이다. 1775년 독립전쟁이 발발하고 2차 대륙 의회(The Second Continental Congress)가 열렸다. 독립선언서가 채택된 것도, 연합의 이름을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으로 정한 것도 바로 대륙 의회였다.
한창 전쟁 중이던 1777년 2차 대륙 의회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열셋 정치체가 미합중국이라는 하나의 연합체를 구성한다는 건국 원칙을 연맹 규약(The Articles of Confederation and Perpetual Union)을 통해 천명했다. 다시 말해, 연맹 규약은 미합중국의 '사실상' 첫 번째 헌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곧바로 연맹 규약이 효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대륙 회의 대표자들이 합의한 대로, 열셋 모든 정치체의 비준 절차가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메릴랜드가 연맹 규약을 비준하기까지 장장 3년 2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1781년 3월, 연맹 규약은 마침내 미합중국의 최상위 법으로 효력을 갖게 된다.
정리해보면, 독립선언서로 탄생한 미합중국은 영국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2차 대륙 의회라는 기관에 의하여 대표되었고, 1781년 3월 이후에야 비로소 연맹 규약에 의거하여 연맹 정부의 틀을 갖추게 된 것이다. 우리가 미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의 공식 명칭이 미합중국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다시 말해, 여러 나라의 연합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중앙집권적 형태의 한국과는 전혀 다른 체제인 것이다. 지금도 미국에서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관계는 한국식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관계와 사뭇 다르다. 한국의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는 위계 상으로 볼 때 상하 관계가 분명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동일한 법과 제도가 전국적으로 다 통용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미국 연방 정부와 주 정부는 그렇지 않다.
그렇게 탄생한 미국의 중앙 정부 기구는 연맹 의회(The Congress of the Confederation)가 사실상 전부였다. 연맹 의회는 일원제로 우리가 ‘주’라고 부르는 열셋 단위체의 대표가 모여 연맹의 일을 다뤘던 입법 기구였다. 각 주는 크기에 상관없이 동등한 표를 행사했다. 미국에는 이와 같은 연맹 의회를 제외하면, 독립적인 행정부도, 사법부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1780년대의 대부분 동안 미국은 이렇게 느슨하게 연결된, 어찌 보면 지금의 EU보다도 약한 연합체에 불과했다. 한 예로 당시 연맹 의회에는 조세 권한이 없었다. 중앙 정부의 재정은 소위 "청구"(requisition) 제도를 통해 충당했다. 간단히 말해서, 연맹 의회가 각 주에게 자발적 갹출을 요청하는 방식이었다. 이론상으로는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현실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예를 들어서 연맹 의회는 독립전쟁 시기에 발생한 빚을 갚기 위해서 1786년에 총 380만 달러를 각 주에 청구했으나, 그 결과로 조달된 금액은 단 663 달러였다!
그렇다면 왜 연맹 규약을 수정하여 중앙 정부의 힘을 강화하지 않았을까?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수입품에 세금(5%)을 매길 수 있는 권한을 중앙 정부에 부여하는 법안이 1781년과 1783년에 발의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연맹 규약의 만장일치 규정 때문에, 단 한 주만 반대한다고 해도,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실제로 1781년에는 로드 아일랜드가, 1783년에는 버지니아와 뉴욕이 반대하여 앞서 말한 법안은 실패로 끝났다.
신생 국가 미국은 재정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 국방, 치안, 상업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심각한 문제에 시달렸고, 이를 해결하기에 느슨하고 무력한 당시의 중앙 정부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각 주의 유력 지도자들 사이에서 보다 강력한 연방 정부 수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각 주의 대표자들이 1786년 9월, 메릴랜드의 아나폴리스에서 회합했다. 실제로 모인 사람들은 고작 다섯 주의 대표들이었지만(네 개 주는 대표들을 보내지 않았고, 다른 네 개 주는 대표들을 보냈지만 제 때 도착하지 못했다), 이들은 회의 끝에 만장일치로 이듬해에 본격적인 논의를 위해 거국적인 회의를 따로 열기로 결정했다. 아나폴리스 회의 결과가 연맹 의회에 전달되고, 곧 각 주에도 알려졌다. 1787년 5월, 로드 아일랜드를 제외한 열 두 주의 대표 총 55명이 대륙 의회가 열렸었고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었던 옛 수도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제헌의회의 시작이었다.
필라델피아 제헌의회. 단상에 오른 조지 워싱턴 의장과 그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대표적인 원로 밴자민 프랭클린의 모습이 특별히 눈에 띈다. | 그림 출처: Britannica.com
무더위 속에 100일이 넘게 비공개로 진행된 제헌의회는 이견으로 인한 대립과 타협의 연속이었다. 55명 중 16명의 대표들은 중간에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애초에 이들의 임무는 연맹 규약을 수정하는 것이었는데, 회의의 최종 결과물은 연맹 규약의 수정안이 아니라 "연방 헌법"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헌장이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연방 헌법이라는 새로운 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대표들이 위임받아 행해야 했던 소임을 넘어서는 일종의 월권행위였다. 미국 연방 헌법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와 같은 절차 상의 하자를 염두에 두어서인지 제헌의회 대표들인 소위 "입안자"(the Framers)들은 독특한 비준 절차를 제안했다. 상식대로라면 새 헌법안을 기존 연맹 의회로 보내 비준하도록 하거나, 각 주 의회에 비준을 요청할 수 있었을 텐데, 이들은 이와 같은 방식을 모두 거부했다. 대신에, 새로운 절차가 요구되었다. 각 주의 유권자들로 하여금 대표자들을 새로 선출하여 헌법 비준을 위한 목적으로 특별 회의체를 구성하도록 하고, 바로 그 회의에서 헌법안에 대한 토론과 비준 투표를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만장일치 규정도 철폐되었다. 13개의 주 중에서 9개의 주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헌법안을 비준한다면, 새 연방 헌법이 승인된 것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했다. 연방 헌법의 민주적 정당성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확보되었다.
독립전쟁 당시 영국의 국왕이었던 조지 3세(좌)와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우) | 사진출처: Royal.uk 외
연방 헌법은 강력한 연방 정부를 새로 탄생시켰다. 대통령직 역시 국가 원수이자 연방 행정부의 수반으로 새롭게 고안되었다. 대통령직을 설계하면서, 제헌의회 대표들은 양 극단을 피해야 했다. 우선, 연맹 규약 하의 무력한 연합체의 문제점을 극복해야 하는 만큼 대부분은 강한 행정부 수반을 도입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불과 얼마 전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폭정에 맞서 독립 국가를 건설한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전제 군주에 대해 심한 반감이 있었다. 폭정을 행사하지 않을 강력한 공화국의 지도자, 바로 그 역할을 대통령이 맡아야 했다.
최종적으로 채택된 "대통령"(President)이라는 이름 자체가 위와 같은 이중 목적을 잘 드러낸다. 연맹 규약 하의 연맹 정부에서도 '프레지던트'라는 직함이 있었다. 유일한 중앙 정부 기관인 의회에서 별다른 힘 없이 의장 역할을 하는 명예직이 바로 그 이름으로 불렸다(라틴어 praesident에서 비롯된 영어 단어 '프레지던트'를 직역하면 앞에 앉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당시 13개 주 중 행정 수반을 '프레지던트'라고 부르는 곳은 펜실베니아, 델라웨어, 뉴 햄프셔 단 세 곳뿐이었는데, 이 '프레지던트'들은 상대적으로 권한이 크지 않은 주지사들이었다. 특별히 펜실베니아 '프레지던트'는 행정 위원회 의장 역에 불과 한 가장 무력한 주지사였다. 반면에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메사츄세츠 주지사를 비롯한 다른 9개 주의 행정 수반은 모두 '가버너'(Governor)로 불렸다. 또한 '프레지던트'는 일상에서도 많이 쓰이는 말이었다. 크고 작은 회사의 사장이나 모임의 대표들도 관습적으로 '프레지던트'로 불렸다. 지금도 그런 것처럼 말이다.
제헌의회가 강력한 국가 원수와 행정부 수반을 탄생시키면서 왜 '가버너'가 아닌 '프레지던트'라는 다소 '가벼운' 이름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한 가지 유력한 설은 새롭게 신설된 연방 정부 수반의 권력과 권한이 그리 강력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제헌의회 대표들이 굳이 연맹 규약 하에서 통용되던 용어이자 상대적으로 약한 최고 행정관 느낌을 주는 용어인 '프레지던트'를 차용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표들은 새로운 연방 정부가 행사할 수 있는 집중된 권력과 국가 원수이자 독립된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에게 부여된 엄청난 권한이 미국인들에게 과대 포장되는 것을 극도로 조심했다. 그것이 헌법안의 원활한 비준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연방 헌법이 성공적으로 비준되고, 새 연방 의회가 첫 회기를 열었을 때, 대통령 명칭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거졌었다. 대통령을 부를 때 그의 힘과 권한에 걸맞게 "미합중국 대통령, 자유의 수호자 전하"(His Highness,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Protector of their Liberties)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상원에서 제기된 것이다. 대부분의 하원의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한 표현은 세습 군주에나 어울릴 뿐, 미국이 표방하는 공화국의 지도자와 걸맞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새로운 공화국의 지도자는 어떻게 선출해야 할까? 제헌의회에 참가한 대표들 중 일부는 연방 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보았다. 헌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도 처음에 같은 생각이었다. 소수지만 일군의 대표들은 일반 유권자가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보았다. 제임스 윌슨이 이를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각 주 의회에서 결정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본 이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채택된 제도는 이 세 안이 모두 아니었다. 제헌의회가 종료되기 불과 2주도 남지 않았을 무렵, 독창적인 제도가 건의되었다. 지금까지도 때때로 논란의 중심이 되는 대통령 선거인단이라는 초유의 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