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퍼스트 슬램덩크 더빙 분석②─목소리의 디졸브

소연(이한나) 편

by 김목청

<더 퍼스트 슬램덩크> 우리말 더빙 분석 1편을 쓴 지 어언 2년...그 동안 슬램덩크에 대한 애정이 식었냐고요? 그럴 리가요. 더퍼슬은 제 가슴 속에서 그냥 막 계~~속 뛰고 있습니다...극장에 재개봉이 두 번이나 올라올 동안 미루고 미루던 글을 다시 이어 쓰기 시작했다. 이유는 없고 그냥 갑자기 소연 성우 생각하다가 벅차오름.



...그런 연유로 2편에서는 채치수도 정대만도 심지어 주인공인 송태섭도 아닌 이한나의 성우, 소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드가자!)


4adf08c6.bmp


이한나라는 캐릭터에 대해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북산고 농구부의 매니저이자 정신적 지주이다. 스포츠 만화에서 매니저, 그것도 여자 매니저라는 직책과 캐릭터는 평가절하되기 일쑤지만 한나는 특유의 태양 같은 매력으로 그런 납작한 해석을 거부한다. 채소연이 지고지순함과 상냥함으로 주인공 강백호를 농구의 세계로 이끌었다면, 이한나는 특유의 털털함과 엄격함으로 강백호가 농구부에 섞일 수 있도록 돕는다. 입부 직후, 기본기가 부족한 강백호를 이끌어 준 것도 한나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한나가 바로 송태섭의 짝사랑 상대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독자─그리고 시청자 ─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송태섭의 경기력이 상승하는 장면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한나는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다! 남자 동급생인 송태섭의 구애에 여지를 주지 않으면서도 매니저로서 선수 송태섭의 기량을 끌어올려 준다. 한나가 태섭이에게 요구하는 것은 '남자'로서의 사랑의 증명이 아니라, '선수'로서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니까.


원작과 TVA판에서 송태섭은 그리 멋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아무래도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송태섭이 아니라 강백호니까.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하기 전까지 독자들에게 익숙한 송태섭을 아마 이런 멋없는 모습이었을 거다.


Fnkd4XoaAAMcRqs.jpeg


다시 성우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한나의 성우가 소연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역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소연 성우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고전적이면서도 트렌디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는 목소리라고나 할까. 이른바 '모던하면서도 클래식한' 성우라고 할 수 있다.


출중한 연기력으로 맡는 배역의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지만(억압받던 유년기에서 해방되는 <겨울왕국>의 엘사, 깜찍하지만 한 대 콩 쥐어박고 싶은 <주먹왕 랄프>의 바넬로피, 상반된 매력을 뽐내는 <캐릭캐릭 체인지>의 시아·시우 등...) 기본적으로 성숙하고 섹시한 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건강미의 대명사, 한나에게는 제격인 성우다.


근 몇 년 간 개봉한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후속작이나, 리메이크판에서 소연 성우가 배역을 이어받는 사례가 잦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역시, TVA판에서는 장.꾸의 살아있는 상징! 최덕희 성우의 역할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생각나는 역할이 있는데 그건 바로바로...



<토이스토리4>의 보 핍! 보 핍은 주인공 우디의 여자친구였으나, 3편 초반에 다 자라버린 아이들이 더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게 되자 다른 곳으로 기부되며 우디와 이별하게 된다. 주인공의 여자친구임에도 많은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는데, 도자기 인형이라 움직임에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3편까지는 온화하고 얌전하여 모험에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였기 때문도 크다.


그러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토이스토리> 속 여성 캐릭터도 재해석되었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자라고, 장난감이 필연적으로 버려질 수밖에 없다면, 버려진 장난감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4편에서 보 핍은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재등장한다! 포스터 속 자세만 봐도 알겠지만, 요조숙녀 같던 보핍은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거침없고 주인의 유무에 얽매이지 않는 장난감이 되었다. 그러니까 '장난감의 숙명'을 거부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여담으로 3편까지의 매끄러운 도자기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보핍을 연기하던 성우는 이현선이다. 우리에게는 <카드캡터 체리>의 지수로 익숙한 성우인데, 세상이 아무리 미쳐 돌아가서 자연스러움이 최고라고 우겨대도 이런 신비로운 목소리가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는 거죠...


https://youtu.be/Am0givwz5ng?si=cH2EWny603jLpf8y


나는 이현선 성우의 보핍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토이스토리4>의 보 핍은 소연 성우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얌전하던 보핍이 거친 세상에 뛰어들기로 마음 먹은 순간, 이야기는 변화하고 성우의 연기에도 색다른 생동감이 필요해진다. 서사의 분기점에서 새로운 성우의 목소리가 덧입혀지는 순간, 캐릭터는 재해석되고 이야기는 풍부해진다. 그리고 이런 풍부함을 선사하는 데 제격인 성우가 바로 소연인 것이다.


https://youtu.be/zl0zk-fuF_Q?si=XWAJ-1I9hGYsMgPj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가장 심장을 뛰게 하는 장면이라고 한다면 역시 이한나의 "뚫어~~~~ 송태섭!!!"을 뽑을 수 있겠다. 이 장면에 심금이 떨리는 이유는 송태섭이 경기 내내 자신을 짓누르던 존프레스와 자신의 인생 전반을 짓눌러왔던 압박감을 뚫고 드리블을 하며 내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말 더빙의 관점에서 보면 또다른 감동 포인트가 존재한다. 그건 다름 아닌 송태섭에게 "뚫어!"를 외치는 두 여자, 한나와 태섭이 엄마의 성우가 소연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장면을 대략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송태섭을 도무지 빠져나갈 곳이 없는 존에 갇힌다. 인생이 송태섭의 목을 죄어온다. 송태섭은 땀을 흘리며 드리블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코트 밖에서 몰래 지켜보는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은 바로 송태섭의 엄마(cv.소연)이다. 송태섭의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인생을 헤쳐오는 것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본다. 그 순간,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뚫어..." 아들에게까지 닿지 못한 이 작은 속삭임을 이어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코트 안에서 송태섭을 지켜보고 있던 한나(cv.소연)다. 한나의 외침을 들은 송태섭은, 마침내 뚫는다.


이 장면에서 송태섭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여자의 목소리가 한데 합쳐진다. 내가 우리말 더빙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소연 성우가 두 역할을 동시에 연기한 것은 아마 의도된 캐스팅은 아닐 것이다.(우리말 더빙의 많은 중복 캐스팅은 우연에 의해 일어난다ㅋㅋ) 하지만 의도하지 않아도 목소리가 겹치는 순간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 그런 힘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목소리가 가진 힘이다.


소연 성우는 최근 건강 문제로 하차한 강희선 성우에게서 <짱구는 못말려>의 봉미선까지 이어받았는데, 이미 시청자들에게 각인되어버린 캐릭터를 이어받는다는 것은 성우로서 꽤나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성우의 세대 교체가 일어날 때─그것도 완전한 리메이크가 아니라, 오직 한 배역만 바뀔 경우─가장 우선순위로 고려하는 것은 기존의 캐릭터성을 위화감 없이 유지하면서도, 자신만의 연기를 뽐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연 성우는 가장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성우이다. 어떤 배역도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하면서도 거부감 없이 청자에게 다가가는 것. 그것이 소연 성우가 가진 힘이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더 퍼스트 슬램덩크 더빙 분석①─구관이 명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