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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May 22. 2019

나의 얼굴에 담긴 이야기

삶의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습니다만.


평일 오전, 오랜만에 쉬게 되어 목욕탕으로 달려갔다. 가장 좋아하는 미지근한 온도의 허브탕에 몸을 기대고 앉아 목욕탕에서 먹어야 제 맛인 달디 단 커피를 빨대로 쪽쪽 흡입하고 있었다. 옆 자리에서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한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에도 낯이 익어 가벼운 목례를 하던 사이였다. 아주머니는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출근 안 하나 봐요? 평일인데 오늘은 느긋하네."     


몸과 마음의 긴장을 늘 풀지 못하는 성격인 나에게 목욕탕은 노곤함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힐링 공간이다. 그래서 목욕탕에서만큼은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 아는 사람을 만나도 도망가듯 한구석으로 피하곤 한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아는 척을 하는 분을 만나면 피해 갈 수가 없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네. 오늘은 쉬는 날이에요."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얼른 고개를 돌려 대화를 피하려는 나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주머니는 재빨리 질문을 이어갔다.      


"그런데 전에부터 새댁 보면 궁금한 게 있었는데, 물어봐도 될까?"     


"아, 네. 뭔데요?"     


안면 정도만 익힌 사이에 무엇이 그리 궁금하다는 것인지,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아주머니의 호기심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게 말이야. 내가 평소에 유심히 보니까 운동도 열심히 하는 것 같고, 옷도 내 맘에 들게 입고 다니던데, 딱 하나 아쉬운 게 있어서 말이야. 얼굴에 점이 많은데, 점은 왜 안 빼는 거야?"     


'헉!' 싶었다. 탕 안에서는 눈을 감고 어느 누구와도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강경하게 전달했어야 했는데, 나의 실수다.      


"그냥, 뭐랄까, 그러니까, 전 얼굴에 점이 있는 것도 괜찮아서요.”     


"아이고, 무슨 말이야, 젊은 새댁이. 피부는 젊을 때부터 관리를 해야지. 특히 눈썹에 있는 그 큰 점들, 난 처음에 보고 뭐가 저렇게 낫나 했잖아. 얼굴이 지저분해 보이는데, 그런 걸 왜 안 빼고 놔두는 거야."     


'헐, 지저분하다고요? 점을 빼든 말든 아주머니가 무슨 상관이세요!'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말을 간신히 속 안으로 삼켰다. 그제야 아주머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점은커녕 주름살 하나 없는 팽팽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얼굴이 모범 답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표정에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아주머니의 기준에서 보면 세고 세어도 계속 나올 것 같은 점들과 미간에 주름이 새겨진 나의 얼굴은 낙제점을 받은 답안지인 셈이다. 안타까운 듯 아주머니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잘 아는 피부과가 있는데, 소개해줄까? 내가 말하면 그리 비싸게도 안 받을 거야. 새댁을 몇 번 보다 보니까 조금만 관리하면 이뻐지겠다 싶어서 그래요."     


대화를 계속하면 잘 숨겨온 내 까칠한 성격이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집 근처에서 지금 다니는 목욕탕만큼 편안한 장소를 물색하기는 어려울 테니, 본색을 드러내기엔 아직 시기상조란 생각이 들었다.     


"아, 네.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지금은 제 얼굴에 만족하는데, 다음에 생각 바뀌면 말씀드릴게요. 고맙습니다."라고 대충 얼버무리고는 커피를 챙겨 냉탕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주머니 눈길이 나의 뒤통수를 따라다니는 것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는 척하며 냉탕에서 세차게 물장구를 쳤다. 나의 분노의 발길질을 눈치채길 바라면서.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영화 <눈물의 미학>을 보았다. 슬로베니아 작품으로 주위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노인 알버트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모두들 알버트를 외면하지만, 그를 돌봐주는 가정부 이다는 매일 찾아와 알버트에게 관심을 표현한다. 이다는 늘 거친 말을 토해내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알버트에게 세상과 소통할 것을 권유한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야기가 담겨있어요. 알버트 씨 얼굴에도 이야기가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가만히 마주하고 그들의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보라는 이다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영화 <눈물의 미학> 중 한 장면


영화를 보며 이 대사가 마음에 내내 남았다. 얼굴의 점과 주름들을, 없애버려야 하는 흠이나 자국이 아니라 그 혹은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나는 무언가 집중하면 미간에 주름을 짓고 입을 삐죽 내미는 버릇이 있다. 보기에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진짜 몰입의 순간에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자세인지를 잊게 만들 때이므로 고쳐지지가 않는다. 일이 많아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어김없이 얼굴에 뾰루지가 올라오는데, 이 녀석들을 하나하나 진정시켜 줄 마음의 여유와 시간이 없다 보니 방치해서 점이 되곤 한다.      


얼굴의 주름과 점들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왔다는, 그리고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우긴다면 잡티 많은 나의 얼굴을 너무 미화하는 것일까.     


목욕탕을 갈 때마다 당분간은 아주머니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따갑겠지만, 점을 빼거나 주름살을 펴라는 아주머니의 설득을 귓등으로 들으려 한다. 나의 얼굴에 담긴 나만의 고유한 서사를 부정하고 싶지 않고 오히려 이대로 지키며 나이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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