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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Feb 15. 2023

평일 오후 두 시의 글쓰기

꿈에 그리던 사치스러운 일상


하루 종일 쓰고 싶은 글만 쓰는 삶!


글쓰기가 내 영혼의 해방구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몸과 마음을 옥죄는 사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한 것은 이십 대 때부터다. 나의 삶에서 글쓰기가 주는 양면성을 발견한 후, 글 쓰는 시간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일상을 동경했다.


스물셋에 방송작가로 입봉 한 나는, 이십 대 내내 마감에 헐떡이는 글쓰기를 했다. 매일 방송하는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았을 때는 오후 시간을 다음 방송 출연자 섭외, 내일 원고를 쓰기 위한 자료 수집, 청취자의 사연을 고르고 다듬는 일에 써야 했다. 일주일 단위로 제작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들 때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일주일 중 방송 원고를 쓰는 때는 하루 남짓, 그것도 남들이 잠든 새벽 시간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억지로 글을 썼다. 오후를 포함한 많은 시간들은 아이템을 찾고, 구성안을 만들고, 촬영한 장면들을 확인하며 분주히 몸을 움직여야 했다.


서른이 넘어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낮 시간에 그날 갑자기 떠오른 글감으로 글을 잇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당장 들어야 하는 수업이나 시험 준비로 늘 바빴고, 여러 편의 논문을 쓰기 위해 이론서를 줄지어 읽고 내용을 정리하기에 급급했다. 박사 학위를 딴 후에는 수업을 듣기 위한 준비 대신 수업을 하기 위한 준비로 몇 배의 시간이 필요했고, 돈이나 명예를 받기 위한 보고서나 논문을 쓰기에도 하루하루가 부족했다.


그럴 때일수록 글쓰기에 목말랐다. 내 감정과 사유를 들여다보고 정리하는 진짜 나의 글쓰기가! 결국 나의 선택지는 잠을 줄이거나 다른 여가생활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출근시간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침 일기를 쓰거나 기다리던 휴일이 찾아오면 약속을 잡지 않고 방에서 뒹굴며 책을 읽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썼다. 시간의 틈을 찾아 꼬깃꼬깃 써놓은 글귀들이 있어 빡빡하고 쫓기듯 살던 이십 대와 삼십 대를 버틸 수 있었다.


얼마 전, 내 나이 마흔여섯을 넘어서며 문득 나의 과거들이 안쓰러워 보듬어주고 싶은 순간이 생겼다.


지난 겨울, 광안리 바닷가 카페에서 지인을 기다리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백사장에는 여행과 나들이를 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다 나의 눈길이 세 여성에게 멈춰 섰다. 이십대로 보이는 세 사람은 비슷한 디자인에 색깔이 다른 코트를 입고, 긴 머리를 찰랑이며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중이었다. 먼 거리였는데도 그들의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 닿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 저렇게 즐거울까? 참 맑고 밝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 한편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어느새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누가 볼세라 얼른 휴지로 눈물을 훔치고 가만히 생각했다. 힘껏 웃고, 마음껏 뛰노는 싱그러운 젊음들이 너무 부러워서, 그런 청춘을 보내지 못한 어린 내가 문득 떠올라서 한 순간에 나의 감정이 요동쳤구나. 하고 싶은 일을 온전히 누리는 일상이란, 이십 대와 삼십 대의 나에게는 꿈에서나 잡을 수 있는 사치의 시간이었구나 싶었다. 내가 한낮에는 그토록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2023년은 좀 달라진 일상을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손 앞에 성과들만 집어 쌓아 올린 내 경력의 블록을 과감히 무너뜨리기로 한 것이다. 매 학기 습관처럼 반복하던 강의들을 취소했고, 정해진 틀에 맞추어 타인이 원하는 결론을 내기 위해 내달리는 글쓰기를 맡지 않았다. 이는 매달 혹은 분기별로 통장의 숫자를 풍요롭게 하던 경제 활동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다행히 그동안 틈틈이 저축을 했고 원래 씀씀이가 큰 편이 아니어서 일 년은 쉬어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올해 아무도 승인해주진 않았지만 스스로 부여한 선물 같은 시간 '안식년'을 맞이하였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시간은 정확히 오후 두 시부터다. 한낮에 여유롭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무 말 대잔치’를 글로 옮기는 하루라니! 그렇다. 나는 지금 젊은 날의 내가 신기루처럼 좇던 꿈의 일상을 누리고 있다. 명품 가방이나 고급차, 넓은 집을 가지진 않았지만 난 지금 누구보다 사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남들은 일터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에, 나는 제일 애정하는 간식 소금빵과 커피 한잔을 곁에 두고 써도 그만, 쓰지 않아도 그만인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 불안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아직은 문득문득 이렇게 놀아도 될까 하는 자책감과 경제적 여유가 부족할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과거의 내가 말을 걸어온다. “괜찮아! 지난날 누리지 못한 것들을 모아서 내가 곳간에다 잘 쟁여두었으니 현재의 너는 하나씩 꺼내서 귀하게 여기며 누리기만 하면 된단다.”라고 의젓하게 미소 지어 준다. 그러니 당분간은 기분 좋게 독서와 운동으로 아침을 열고,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오후에 들어서면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생활을 이어갈 작정이다. 인생에 일 년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시간의 호사를 누리는 보너스가 우리 모두에겐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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