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동네에 정을 붙이는 방법
후배가 이사를 계획 중이다. 여러 동네를 돌며 집을 둘러보는데 고르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집 내부 구조나 연식, 평수도 중요하지만 집 외부 조건들도 하나하나 따져보아야 한단다. 곧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이를 두고 있어 학군이나 교통편, 여러 제반 시설 같은 이른바 입지조건을 꼼꼼히 챙겨야 한다고 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어떠냐며 물어보려다 얼른 그 말을 삼켰다. 나에게 좋은 것이 꼭 남에게도 좋다고 확신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sns에서 그 지역이 살기에 괜찮은지 알려면 대기업의 커피 체인점과 화장품 스토어, 햄버거 브랜드가 있는지 살피면 된다는 글을 보았다. 해당 기업들이 철저한 시장분석을 한 후 가게를 차렸을 테니 경제적 가치를 간접적으로 입증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럼 난 무엇을 근거로 내가 거주하는 동네를 후배에게 추천하려 했을까?
결혼 후 지금의 동네에 정착했으니, 이 지역 주민이 된 지도 어느덧 십팔 년 차가 되었다. 처음엔 지하철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이십 분 남짓의 길이 미로처럼 느껴질 만큼 동네가 낯설고 어색했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지역에 비하면 사람도, 차도, 가게도 지나치게 많은 번화가였다. 덩치 큰 건물들에 기가 눌리고, 시끄러운 경적 소리에 걷다가 몇 번씩 깜짝 놀라곤 했다. 과연 이 동네에서 내가 안락함을 느끼며 생활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정신없는 몇 달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옛 동네를 마냥 그리워할 수만은 없으니,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정착을 하려면 스스로 노력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동네에 정을 붙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일단 그곳에 가면 스르르 긴장감이 풀어지는 일명 ‘나만의 힐링 스폿’들을 선정하기로 했다.
처음 내가 찾아 나선 공간은 대중목욕탕이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 거의 매일 목욕탕을 다니며 ‘달목욕’ 문화에 익숙했던 나였기에 목욕탕은 몸의 피로를 푸는 곳 이상의 의미가 있다. 새벽이나 아침 시간에 목욕탕을 찾아가 뜨끈한 탕에 앉아 반신욕을 하다 보면 뭉친 근육도 풀리고, 지난밤까지 응어리졌던 마음의 뭉치들도 스르르 풀렸다. 눈을 감고 물의 감촉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노라면 방금 전까지 내게 덕지덕지 붙어있던 근심과 고민들이 한결 가벼워져 물 위로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집 근처 세 군데의 대중목욕탕을 다녀본 후 목욕탕의 규모와 탕의 물 온도, 집과의 거리를 따져 단골 목욕탕을 정했다. 목욕탕을 방문할 때마다 앉을자리를 눈으로 찜해놓고, 파스텔톤의 목욕 바구니를 구비하자 이 동네에 반쯤은 적응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으로 내가 찾아 나선 나만의 아지트는 카페였다.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이라 웬만큼 유명한 프랜차이즈 카페들은 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찾는 카페는 가게가 크지 않아 공간을 커피 원두의 향으로 가득 채울 수 있고, 테이블과 의자가 단출하게 놓여 있어 소박함과 더불어 안락함을 주는 곳이었다. 며칠 동안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다 나의 입맛에 맞는 커피가 있거나 의자가 편한 카페, 혹은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는 카페들을 몇 군데 발견했다. 시간이 흐르며 대형 커피숍에 밀려 지금은 한, 두 곳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혼자서 아늑함을 느끼고 싶을 때면 나는 여전히 작은 동네 카페로 숨어든다.
처음엔 낯설기만 했던 거리에서 내 취향에 맞는 공간을 발견하고 점점 방문 횟수를 늘려 단골 가게라고 이름을 붙이자, 동네 전체가 정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세월과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 이젠 친한 이들을 불러 모으고 싶은 자랑스러운 ‘나의 동네’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십수 년 동안 그리 변한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은 동네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태도가 아니었을까. 주거 환경에 대해 sns나 언론, 부동산 전문가들이 말하는 ‘살기 좋은 동네’의 조건을 따지기 전에 나만의 기준을 먼저 세우는 일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리고 익숙한 삶의 터전이라 할지라도, 다시 한번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본다면 보물 찾기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