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낳는 건가 vs 안 낳는 건가
나는 결혼 14년 차다. 나를 처음 만나거나 안면 정도만 있는 사람들과 몇 마디 대화를 시작하면 얼마 가지 않아 이 질문에 다다른다.
“아이는 있어요?”
그럼 난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아니요,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마음속으로 거기서 질문을 멈춰줬으면 하지만, 끝내 그들은 또 묻는다.
“못 갖는 거예요, 안 갖는 거예요?”
어떻게 답해야 할까. 나의 경우엔 그 이유가 반반이라 할 수 있다. 결혼 후 아이를 가지려 했으나 세 번의 유산을 경험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못 갖는 것이란 말이 맞다. 이후 병원이나 주위에서 여러 방법을 제안하며 노력을 해보자고 권유했으나 거절했고, 우리 부부는 아이 없는 삶을 선택했다. 그러니 안 갖는 것이란 말도 맞다.
아이가 없는 이유에 대한 나의 대답은 질문한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어차피 이유가 반반이니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나 집단에서는 아이 없이 살기로 했고 지금의 생활에 부부가 만족하고 있다고 간결하게 답한다. 이어서 단호한 눈빛을 보낸다. 더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 다음 화제로 넘어가자는 메시지를 담아서.
현실에선 불행히도 나의 눈빛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주로 나이가 지긋하면서 출산이 곧 여성의 의무라고 생각할 것 같은 사람들에겐, 나름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해야 그 자리를 무난히 넘길 수 있다. 아이를 못 낳았다고 말하는 순간, 상대의 눈빛은 흔들리는데 마치 그의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런 불쌍한 여자 같으니라고!’
때론 내 손을 덥석 잡고 직접 목소리를 내어 말한다.
“내가 아는 사람도 십 년 넘게 없다가 결국 생겼어요. 마흔 넘어도 건강하니 아이 가질 수 있을 거예요.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만약 있는 그대로 몇 번 시도 후 낳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하면 상황이 귀찮아진다. 아직 젊은데 안 낳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서 시작해, 아이가 주는 행복과 아이 없는 부부 관계에 대한 걱정, 나아가 노후의 외로움까지 내 인생 전반에 대한 우울한 카운슬링을 듣고 있어야 한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돌아서서 철없고 이기적인 여자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크다. 경험상 이기적인 여자보다는 측은한 여자로 보이는 편이 여러모로 편하다.
결론은 어느 경우든 내 입장에서는 대답 후 마음속에 불편함이 남는다는 것이다. 아이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타인에게 하나의 이미지로 정형화되고 평가받는다는 사실이 거북하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대하길 바라냐고 되묻는다면, 아이 없는 삶도 자연스러운 일로 편하게 인정받기를 원한다고 답하고 싶다.
“아이가 왜 없나요?”란 물음에 “아이 없이 사는 게 너무 편하고 좋아서요”라고 답하는 이를 만난 적이 있는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이 없는 삶이 자발적 선택이든, 그렇지 않든 대부분은 겸연쩍어하며 “있으면 좋겠지만, 없이 살기로 했어요”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끝맺으려 한다. 더 이상의 관심이나 공격을 받지 않으려는 방어술이다.
많은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건네는 질문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안다. 오히려 관심과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자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아이 없는 여성들은 채근하듯 던지는 말이나 행동에 당혹감이나 스트레스를 받는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반대로 부모가 된 사람들에게 “아이를 왜 낳았나요?”라고 이유를 캐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아마도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지?’라고 생각하며 어이없어할지 모른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행위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이고 문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산이 결혼제도를 택한 부부나 여성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아이 없는 이유를 처음 만난 사람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킬 의무도 없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
나는 불쌍한 여자도, 이기적인 여자도 아니다. 다만 다양한 인생의 모습 중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한 여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