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으로 가득 찼던 시절의 자기 고백
단짝 친구들과 모처럼 모임을 가졌다. 고등학교 3년을 함께 보냈고, 각자 빛나는 20대와 30대를 보낸 후 다시 모인 세 명의 친구들은 40대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
셋은 모두 다른 대학에 진학했고 20대엔 공통분모가 거의 없는 직업들을 택했으며, 30대를 맞이하며 각자 배우자상과 결혼관도 너무 달랐다. 친구들 중 제일 먼저 결혼한 나는 서른에 평범한 회사원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안정적인 삶을 꿈꿨다. 두 번째 결혼한 친구는 이른바, 조건 좋은 남성들이 끊임없이 구애를 해도 본 척도 하지 않는 커리어우먼으로 살더니, 서른다섯에 자신을 향한 사랑이 더없이 크다는 남성을 만나 전업주부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본인뿐만 아니라, 친구인 우리마저도 결혼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했던 마지막 친구는 지난해 캐나다에서 만난 현지 남성과 결혼했고, 곧 캐나다로 떠날 예정이다.
여고 동창이지만, 서로 너무 다른 삶을 살던 우리에게 40대가 되자 공통분모가 생겼다. 현재 셋은 모두 아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며칠 전 이사를 한 친구 집에 놀러를 갔고 우리 셋은 밤늦도록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수다의 시작은 고등학교 시절 추억에 관한 것이었다. 왜 학창 시절의 기억은 곱씹고 또 곱씹어도 질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맥주가 한 잔, 두 잔 들어가고 이야기가 무르익자 각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속내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은 그래서 참 좋다. 나의 허물이나 진짜 감정을 공유하면서 ‘나를 어떻게 볼까, 내 이미지가 안 좋아지면 어쩌나’ 같은 계산을 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다 보니 셋 중, 결혼과 아이 없는 삶의 제일 선임이 된 나에게 친구들이 물었다.
“너희 부부는 정말 아이에 대한 생각이나 미련은 없는 거야?”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응. 미련이라면 결혼하고 5년 즈음에 이미 다 거둬들였고,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글쎄, 가끔 길에서 다정한 모녀를 볼 때? 문득 나한테 딸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 그 순간뿐이야. 내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함 같은 거랄까. 지금은 이기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아이 없는 삶이 꽤 좋고 편하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만족해.”
그러자 한 친구가 말했다.
“그렇구나. 나는 아직은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잘 안되니까 몸도 마음도 점점 지치는 것 같아. 그래도 포기가 안 돼.”
나와 상황은 다르지만 친구의 말에 깊이 공감이 갔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을 지나왔으니까. 하지만 섣불리 조언하려 들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갖고자 노력했을 당시, “다음엔 잘 될 거야”,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럴지 모르니 마음을 비워봐” 등의 조언이 전혀 위로도,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그럴 수 있지”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소심한 고갯짓을 멈춰 세운 것은 친구의 다음 말이었다.
“아이를 갖지 못하고, 일도 안 하고 있으니까 남편한테도 미안하고 의기소침해져.”
“왜? 남편이 뭐라고 해?”
“아니, 전혀. 오히려 내가 아이 문제로 스트레스받을까 봐 얼마나 조심하는데. 그냥 내가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어”
“일은 왜? 너 지금 전업주부의 삶에 만족하고 살림하는 게 적성에도 맞다고 했잖아”
친구들은 나와는 전혀 다르게, 살림의 재능과 재주가 탁월하다. 둘 다 요리면 요리, 집 꾸미기에 화초 가꾸기까지 모두 자기 손으로 척척 해내며 전문가 못지않은 솜씨를 자랑한다.
“아이도 없으면서 집에만 있으니까, 뭔가 내가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다는 생각에 초조하달까.”
친구와의 대화는 어느새 까맣게 잊고 지냈던 나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결혼 후 삼, 사 년 동안 나도 아기를 가지려 애를 썼다. 세 번의 임신을 했지만 모두 4개월을 넘지 못하고 유산을 했다. 워낙 예민한 성격인 데다, 입덧도 남들보다 심한 편이어서 임신을 확인한 후 줄곧 집에서 누워만 지냈다. 그렇게 좋아하던 책 읽기와 글쓰기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참았다. 아이를 갖는 일은 답답함과 힘듦을 감내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을 테니까. 몸은 점점 지쳐갔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 그러나 임신은 출산이라는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고, 나의 정신은 피폐해졌다.
세 번째 아이를 유산한 후에는 남들에게 그토록 쉬운 일이 나에겐 왜 허락되지 않는지 하늘을 원망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 길에서 우연히 임산부를 만나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배를 빤히 쳐다보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가슴에서 울컥하고 응어리가 넘어오는 것을 간신히 참은 적도 있었다.
아직 남편을 비롯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도 있다. 어느 날 집안에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아파트 14층 베란다에서 떨어지면 그냥 이 슬픔에서 깨끗하게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내 고개를 젓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잠시나마 나쁜 마음을 품었던 것을 후회했지만.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나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직 아이를 낳기 위해 남편을 사랑한 것도, 결혼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아이가 주는 행복이 말할 수 없이 크겠지만, 나의 삶에는 나를 즐겁고 기쁘게 하는 수많은 일이 남아있었다. 언제까지 아이 문제도 나의 일상을 송두리째 우울이라는 어두운 동굴 속에 가둘 수는 없었다.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뒤이어 내가 선택한 것이 공부였다. 뭔가 몰입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대학원 석사까지 마친 후, 공부에 대한 아쉬움도 남아있었기에 지체 없이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그때는 그것이 잘못된 선택인지 몰랐다. 나는 나 자신에게 더 물었어야 했다. 정말 공부를 하고 싶다는 순수한 목적에서 박사 과정을 선택한 것인지, 혹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박사 과정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보냈다. 늘 수업에서 가장 많은 발표를 했고, 매 학기 논문을 써서 학회에 발표했으며, 방송작가의 실무 경력이 인정되어 과정이 끝나기 전에 학부생들을 가르칠 기회도 얻었다. 돌이켜보면 평소 나의 약한 체력과 역량에 비해 너무 버거운 일들을 해내고 있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이 시기를 내 인생에서 ‘열등감의 터널’이라고 부른다. 아이를 낳는 일은 여성의 의무이고 권리이기에 그 일을 하지 않거나 못한다면 대체할 무엇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나의 삶도 가치 있었다고 인정해 줄 것만 같았다. ‘아이 있는 삶’을 사람들을 향해 가지는 남모를 나의 열등감이었다. 어쩌면 스스로 나를 이 사회에서 정상이 아닌 여성으로 규정짓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정상, 아니 그 이상으로 보이기 위해 달려야 했다.
‘열등감의 터널’ 시기를 지나며 나는 늘 불안했다. 자녀를 둔 대학원생들의 프로젝트나 논문이 미뤄지면 모두 아이 키우면서 공부를 병행하기 힘들다고 이해해 줬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대학원 선, 후배들마저 “아이가 없으니 공부할 시간이 많아서 좋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실제로는 나 역시, 공부 외에 할 일이 많았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항상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들은 내가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과제나 발표에 대해 칭찬을 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서 남들보다 더 기를 쓰고 공부했다. 아이는 없지만 그래도 ‘완벽한 여성’으로 보이기를 바라면서.
‘열등감의 터널’ 시기에 나는 휴식을 즐길 줄 몰랐다. 아이도 없으면서 집에서 빈둥대는 것에 죄책감이 들 때도 있었다. 다이어리에 주말에 할 일들까지 꼼꼼히 계획을 세워 둬야 안심을 했다.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면서는 매번 방학이 오면 신경이 곤두섰다. 다음 학기에도 강의가 개설될 수 있을지, 개설되더라도 학생들 수가 채워지지 않아 폐강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했다. 이때조차 내가 정말 일을 계속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다. 방학이라는 긴 휴식 기간도 즐기지 못했고 집에 있는 시간보다 도서관이나 특강을 돌며 또 다른 일을 찾아다녔다.
공부나 시간강사 일을 하는 것이 재미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 고달프고 힘겹게 느껴져 쉬고 싶을 때가 더 많았다. ‘한 학기라도 좀 쉬었으면, 방학 때라도 편히 놀고 싶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게 눌렀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 아이가 없어서 생긴 열등의식 때문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당시 내가 처했던 상황과 평소 성격이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늘 불안이라는 감정에 짓눌러 있던 나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이도 없으면서 다른 직업을 갖지 않는다면 모두가 나를 게으른 여성으로 볼 것이란 죄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는 여성으로서 “아이를 낳고 키우진 않지만, 대신 이렇게 보람되고 바쁜 삶을 하고 있어요!”라고 외치고 싶었던 것이리라.
지금의 나는 달라졌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찾는 긴 시간 끝에, 내가 대학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생들과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이 보람 있었지만 난 창작 활동을 할 때 더 뜨거운 열정을 내뿜는 사람이었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저명한 학자나 논증 구조를 통해 나의 주장을 증명하는 논문 글보다는, 나의 진짜 속내를 전하는 진솔한 이야기 그리고 따뜻하고 공감 가는 이웃들의 이야기였다.
일단 무조건 쉬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어떤 의지도 짜내지 않고 나를 가만히 두고 싶었다. 무작정 학교를 그만뒀다. 그리곤 남편과 훌쩍 여행을 떠났고, 여러 날을 혼자 바닷가 카페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서툰 살림 솜씨지만 청소에 요리, 집안 꾸미기도 도전했다. 얼마 못 가 살림에는 엄청난 재능이 필요함을 깨닫고 포기했지만 말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다면 나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고 있다고 답하겠다. 다시 일을 시작했다. 대학에 있을 때만큼 명예와 미래가 보장되는 일은 아니지만 나의 체력과 역량에 맞게 하루치 일을 자유롭게 배분할 수 있는 일이다. ‘아이 있는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열등감도 거의 없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모든 여성들이 존중받아야 마땅하듯,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한 여성들 또한 존경한다. 아니 그보다는 자녀가 있는 여성, 자녀가 없는 여성 또는 일하는 여성, 전업주부로 여성을 구분 짓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의 틀 안에 가둘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 그냥 나니까!
더 이상 나는 아이 있는 여성들에게 자격지심을 갖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는 동료 여성들에게 애정과 지지를 보내지만, 그들이 육아를 하는 시간을 대체하기 위해 나 역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나에게 맞는 사이클로 일상을 살아가면 되고, 그 안에서 결핍을 느끼는 부분이 생긴다면 그때마다 하나씩 채워나가면 되니까. 물론 그 결핍이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 아닌, 진짜 내가 하고 싶고 필요한 일이어야 한다.
그날 친구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말을 여기에 남긴다.
"친구들아, 무조건 괜찮아! 일을 해도, 하지 않아도, 아이를 낳아도, 낳지 않아도, 너는 너라서 충분히 아름다워. 우리는 충분히 잘 살고 있으니, 잘난 척하며 살아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