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든 아이

by 별하열음

아이가 철이 빨리 들었다는 이야기는 어른들 사이에서는 아이를 칭찬하는 말로 본 나이보다 어른스럽고 의젓하며 자신의 앞가림을 잘하는 것을 뜻한다. 나도 어렸을 때 어느 순간부터 그런 이야기를 종종 어른들에게서 들어왔다. ‘철들었다’ 또는 ‘조숙하다’ 또는 ‘나이보다 어려 보이지 않는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어른들이 의례 하는 말이구나 하며 자라왔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들을 종종 들었고 어른들은 그런 나를 많이 좋아해 주셨다. 그도 그럴 것이 걱정을 끼칠만한 일은 하지 않았고 자립심이 강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보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알아서 하는 편이었다. 말 그대로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아이이니 어른들이 이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면서 자연스럽게 내 안에 받아들여졌고 어른이 되고서야 그것은 살아온 환경 속에서 체득된 것이란 것을 알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좋은 이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개인의 나로 놓고 봤을 때는 결코 좋기만 할 수는 없었다. 철이 빨리 들었다는 것은 철이 빨리 들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 그렇게 받아들이게 했고 그렇게 행동하게 한 것이다. 내게 ‘철든 아이’란 말은 애잔함을 불러온다. 그래서 TV 프로그램에서 철이 빨리 든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감정이 몰입되어 슬픔이 든다. ‘철들 수밖에 없는 아이’ ‘조숙해질 수밖에 없는 아이’가 내가 생각하는 ‘철든 아이’이다.



또래처럼 어리광도 부리고 싶고 자신의 일을 놓치기도 하며 양보보다는 갖고 싶은 것을 쟁취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는 어리광을 받아 줄 사람은 없고 스스로를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을 챙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스스로 많은 것을 오랫동안 자주 하다 보니 서툼은 사라지고 능숙해지게 된다. 능숙해진 아이는 자신도 돌봄을 받아야 하는 나이임에도 누군가를 돌보기 시작한다. 그 누군가를 챙기면서 책임감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아무도 그 나이답게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이가 없기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자라게 된다. 어른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린 나이임에도 엄마를 돕고 동생을 돌보고 하는 아이를 기특하다고 칭찬을 한다. 아이는 어른들의 칭찬을 받으며 더 잘하려고 하고 더 큰 책임감을 갖는다. 그것은 아이의 내면 깊숙한 뼈대가 되고 살이 되며 자란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어 이제 환경이 바뀌었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인정을 받고 좋은 사람으로 평가되지만 스스로에게는 늘 엄격하고 자유롭지 못하며 책임감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무게감을 지니고 산다. 철든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기대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콤플렉스도 갖는다. 그것들이 어른이 되어 살면서 힘겨움으로 다가온다.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고 괴로운지 처음에는 알지 못한다. 살면서 많은 시련 속에서 깨우친 것은 나는 ‘철든 아이’에 몰입하며 살았구나 때로는 철없이 살아도 괜찮고 아무도 그것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이는 먹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철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나도 어느 순간부터 어릴 때 해보지 못했던 것을 해보겠다며 철없는 어린이 마냥 하고 싶은 것을 하지만 그 뼈대와 살은 어디 가지 않고 남아있다. 주변에서 내가 아무리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해도 ‘딱 봐도 장녀 같아’ ‘나이보다 어른스러워’라고 하는 말은 아직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니 말이다. 철없는 아이의 천진함과 소녀스러운 것들을 사랑하면서 그 뼈대와 살에는 철든 아이가 공존했으면 한다. 사회적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철없고 삶이 무겁지 않을 정도로만 성숙한 인간으로 사는 것을 지향한다.



‘철든 아이’는 애잔하면서도 나를 독립적으로 자라게 했고 많은 유익을 주는 요소였다. 하지만 ‘철든 아이’의 삶이 녹록함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기에 나는 그 누구에게도 ‘철이 빨리 들었네’라는 말을 칭찬으로 하고 싶지 않다. 조금 철없게 살아도 괜찮아. 덜 열심히 해도 돼. 힘들 때는 힘들다 말하고 기대면서 사는 거야. 너에게도 돌봄이 필요해. 모든 것을 다 책임지며 살 수는 없어.라는 말들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나 그 어디에나 있을 철이 빨리 든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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