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글쓰기 싱글벙글 번개
'슬초 브런치 프로젝트' 마지막 모임 날, 운명처럼 그녀를 만났다. 공항철도를 타고 서울역으로 가고 있었다. DMC역에서 같은 차를 탄다는 톡이 있었다. 타는 순간, 서로를 알아봤다. 초록색 치마! 우리의 코드를 단 번에 읽어냈다. 뜰 안의 네 잎클로버처럼 그녀의 함박웃음이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이런 감정 정말 오랜만이다. 20여 년 전, 2호선을 타고 대학 다니던 시기, 우연히 몇 번 마주쳤던, 눈을 뗄 수 없는 잘생김 묻은 문짝만 한 그가 맞은편에 앉아있을 때와 같은 설렘이었다.
가까운 지역별로 소모임을 꾸렸다. 내가 사는 지역은 마곡이다. 강서구, 서대문구, 마포구, 양천구, 금천구, 동작지역 작가님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경기 북쪽 일산, 파주 일부 작가님들도 함께 해주셔서 서(울)서(쪽) 모임은 함께 책을 읽어나가는 (상서로울)서 + (책)서 모임이 되었다. 그녀도 서서모임이었다. 함께 책을 읽고 나눌 수 있게 되어 좋았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고, 읽고 쓰는 사람들을 곁에 둘 수 있다니. 나도 곧 우아한 엄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소모임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번개로 그날 시간되는 사람끼리 브런치도 먹고 서점도 들르고 카페에서 수다도 떠는... 혼자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캐서린의 뜰' 작가님의 제안
"이런 바람은 지역 모임에서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후의 글쓰기' 책도 다 읽어가는데, 시간 되시는 분들 번개로 모여 다음 책도 고르고 커피도 마시고 하면 어떨까요?"
'회장'이자 '서울서쪽모임장'의 회신
우리의 첫 만남처럼 서서모임의 첫 모임도 설렘 속에 준비되었다. 아이들 때문에 못 오신다는 분들이 계셔서 레고방 아이디어를 내었다. 두 시간 정도면 거뜬히 집중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작가님 총 10분 + 아이들 총 6명이 모이게 되었다. 마침 육달 남편이 집에 있어서 모임 장소에서 레고방까지 인솔만 부탁하려고 했는데, 아르바이트생처럼 딱 붙어 조립도 도와주고, 실시간 사진도 전송해 주었다.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책 수다에 집중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블록 만들기에 몰입하는 황금 토요일이었다. (여보 고마워)
총무 작가님이 초록색 색지로 우리들의 명패를 만들어오셨다. 덕분에 얼굴과 필명을 연결해서 익히기가 수월했다. 미리 브런치 글들을 읽고 만나자는 숙제가 있었지만, 비슷한 인상의 작가님들을 구별한다는 게 쉽지가 않았다. 이름뿐 아니라 브런치 소개글 속의 문장을 손수 써오셔서 알아맞히기 퀴즈 시간을 가졌다. 자기소개글이 나오면 하나같이 컵을 만지작하는 어색한 제스처를 해서 다행히 쉽게 맞출 수 있었다. 화기애애함 속에 자연스럽게 서로를 눈에 담았다.
서서모임은 이은경 작가님의 '오후의 글쓰기'라는 책을 2주 동안 함께 읽으며, 매일 맘에 드는 문장을 골라 필사하고 온라인으로 감상을 나눴다. 11월 18일부터 함께 읽기 시작했는데, 나는 마침 선물 받은 그 책이 이틀 후에 도착하면서 조금 늦게 합류했다. 뒤늦게 따라가는데, 이미 책을 10번 이상 읽는 느낌이다. 작가님들이 올려주시는 필사 문구와 솔직 담백한 단상만으로도 충분히 책이 내 몸 구석구석에 채워져 있었다.
책을 혼자 읽다가, 분량을 쪼개 매일 함께 읽어나가니 미룰 수가 없었다. 나를 채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게 되어서 좋았는데, 만나서 책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총23강의 글쓰기의 가르침 중에 우리는 각자 가장 마음에 남았던 이야기를 한 명씩 풀어냈다. 혼자 책을 읽어 내려가는 감동이 홍차와 같다면, 눈을 마주치고 공감하는 즐거움은 신선한 레몬즙이다. 웃고 떠들고 맞장구치고 끄덕이는 두 시간 동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를 얻었다.
그들의 글과 내 글을 비교하며 좌절하기보다는
닥치고 쓰자.
야망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얘기들을 담담히 쓰다 보면
내 글만이 줄곧 조용히 들어준다는 위로
쓰지 않았던 시간에도 힘이 있다는 사실
쓸 수 있는 몸과 마음 유지해야겠다는 다짐
30분만 더 일찍 일어나 나를 마주하기
무엇을 미루고 글쓰기를 시작해 볼지 수다
어른이니까 설거지는 내버려 두기로
아침밥 처먹든가 말든가
그렇다면 오늘부터 아침 국은 라면?
서로를 생각해며 준비해 온 중고책들은 받는 사람의 장바구니에 있거나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진짜 취향저격 선물이었다. 사랑의 짝대기처럼 제 주인을 찾아가는 책들이 신기했고, 모두를 위해 예쁜 책갈피까지 사 오신 작가님도 계셔서 훈훈했다. 우리의 다음책, 다소 두꺼워서 무서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에 대한 계획도 세우고, 이끌어주실 리더도 뽑았다. 돌아가면서 서로의 수고를 돕자고 해서 고마웠다. 12월도 3주간 열심히 읽고 한 뼘 더 성장할 예정이다. ‘한 장의 한방’이라는 매거진도 부담 없이 함께 채워보기로 했다. 읽고 쓰는 게 버거운 게 아니라 즐겁게 해 나갈 수 있다는 걸 우리는 믿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