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굴튀김 이야기' 패러디 필사
추운 겨울날의 해 질 녘에 나는 단골 식당에 가서 소주(참이슬 레드)와 코다리찜을 주문한다. 그 가게에는 코다리찜 소(少), 중(中), 대(大) 이렇게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정말 친절하다. 코다리찜을 많이 먹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코다리찜 큰 냄비를 내어준다. 조금만 먹어도 되는 사람들에게는 코다리찜 작은 냄비를 내어준다. 나는 물론 코다리찜 대사이즈를 주문한다. 함께 한 식구들과 배불리 먹고 싶으니까.
코다리찜에는 가볍게 무친 콩나물이 푸짐하게 곁들여 나온다. 아삭아삭하고 신선한 콩나물이다. 원하면 셀프코너를 이용할 수도 있다. 추가 요금은 없다. 그래서 나는 두세 번 리필해 먹는다. 나는 코다리도 좋지만, 그 양념국물에 곁들어 즐기는 콩나물도 정말로 먹고 싶었으니까. 세 번만 가져다 먹으면 충분하다. 내 냄비 위의 코다리 국물이 아직도 보글보글 소리가 난다. 작지만 아주 멋진 소리다. 내가 보는 앞에서 서빙 이모님이 막 뼈를 발랐다. 큼지막한 코다리의 메인 뼈를 쓱 들어 올리고 먹기 좋게 잘라주시는데 불과 오 초도 걸리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_예를 들어 단체 손님이 많은 토요일 점심 코다리찜을 먹는 경우에는_서비스도 큰 의미를 가진다.
젓가락으로 그 코다리살을 들어 올리면, 그 밑에 여전히 국물 자작 잘 익은 무가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겉보기에도 무이고, 무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양념이 스며들긴 했으나, 형태도 둥글고 무는 무이다. 그것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넓은 고랭지 밭 속에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꼼짝도 않고, 밤낮도 없이 그 단단한 땅속에서 무다운 것을 (아마도) 생각하며 지냈다. 그런데 지금은 내 냄비 위에 있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무가 아니고 브런치 작가라는 사실이 기쁘다. 매운 양념에 조려져 코다리 밑에 깔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쁘다. 내가 일단 윤회전생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도 기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다음 생에 무가 될지도 모른다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것을 차분하게 입으로 가져간다. 매콤한 양념과 코다리와 무와 콩나물이 내 입 안으로 들어간다. 야들한 코다리살과 무를 씹을 때의 감촉과 아삭한 콩나물을 씹을 때의 감촉이 당연히 공존해야 할 식감으로 동시에 감지된다. 미묘하게 뒤섞인 향이 축복처럼 입 안에서 퍼져간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는 코다리찜을 먹고 싶었고, 그리고 이렇게 대사이즈 코다리찜을 음미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짬짬이 소주까지 마실 수 있다. 그런 것은 한정된 행복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최근에 내가 한정되지 않은 행복을 맛본 게 언제였을까?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한정되지 않은 것이었을까?
나는 생각해 본다. 그러나 결론은 좀처럼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도 얽혀 있기 때문에 그리 간단히 결론지을 수는 없다. 코다리찜 안에서 무슨 힌트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나는 한동안 남은 코다리 살 점 세 개를 골똘히 응시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나는 이윽고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 남은 소주 한 잔을 비우고, 남편에게 계산을 하라고 하고 밖으로 나온다. 정거장을 향해 걸어갈 때, 나는 어깨 언저리에서 어렴풋하게 코다리찜의 조용한 격려를 느낀다. 그것은 결코 신기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코다리찜은 일종의 소중한 개인적 반영이니까. 그리고 숲 속 저 깊은 곳에서는 누군가가 싸우고 있으니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오후에 코다리 팔아야 하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써봤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조금 친해진 것 같아서 기쁩니다. 오늘도 열심히 읽고 쓰고 팔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