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백세희 작가를 추모하며

밀도 있는 삶을 고민했던 시간들.

by 살라

떠나는 법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간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자꾸만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되짚는다. 며칠 전 백세희 작가의 부고를 접하고, 나는 며칠 동안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부고 소식 전에는 장마처럼 계속 비가 왔던 것 같은데 부고 소식을 들었던 처연한 마음과 달리 요 며칠은 하늘이 얄밉게도 맑다. 즐거운 안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베란다에 비스듬히 걸친 마른 햇볕으로 작가와 인사를 나눈다.

빛은 언제나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기울어진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 제목. 그 책 속 문장에는 삶의 모순이 너무나 정직하게 담겨 있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데도, 여전히 떡볶이는 먹고 싶은 것. 그게 사람이었다.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그래서 더 애처로운.


그가 다섯 명을 살렸다는 기사를 읽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찾은 마지막 문장이었을까. 미움 없이 떠나는 법. 자신의 몸 안에 남은 온기를, 아직 뛰는 심장을,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일.


나도 그렇게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밀도 있게 살다가.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끌어안고, 그러다가 문득 '이제 됐다'는 순간이 오면,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채로. 장기 하나라도 더 젊고 온전할 때,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다시 뛸 수 있도록.


그런 떠남을 상상하면 이상하게도 두렵지가 않다. 오히려 살아 있는 지금이 더 선명해진다. 아직 따뜻한 이 손으로 누군가를 안아줄 수 있다는 것. 아직 뛰는 이 심장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 시간이 유한하다는 걸 알면, 모든 순간이 조금 더 진해진다.



밀도 있는 삶은 무엇일까.


물리학에서 밀도는 단위 부피당 질량이다. 같은 크기의 공간 안에 얼마나 많은 질량이 채워져 있는가. 스펀지와 납덩이가 같은 크기라도, 손에 쥐었을 때의 무게가 다른 이유.


그렇다면 삶의 밀도는 무엇일까.


같은 24시간을 살아도, 어떤 사람의 하루는 스펀지처럼 가볍게 흘러가고, 어떤 사람의 하루는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는다. 무게 중심이 확실한 삶. 그 안에 채워진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삶.



중력을 생각한다.


질량이 있는 물체는 서로를 끌어당긴다. 뉴턴의 만유인력. 질량이 클수록,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 힘은 강해진다.


사랑도 그런 게 아닐까.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끌어당기는 것.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 사람의 중력장 안으로 들어가 함께 공전하는 것. 멀찌감치 떨어져서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라, 충분히 가까이 가서 서로의 궤도를 바꾸는 것.


그런 관계들이 쌓일수록, 삶은 무거워진다. 좋은 의미로.

쉽게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는, 무게 중심이 낮은 삶.



에너지 보존 법칙을 떠올린다.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다만 형태가 바뀔 뿐. 운동에너지가 열에너지로, 빛에너지가 화학에너지로. 우주 안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백세희 작가가 남긴 다섯 개의 장기. 그것은 에너지의 전환이었을까. 한 사람의 생명 에너지가 다섯 사람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 다른 형태로 계속 뛰는 것. 소멸하지 않고, 변환되는 것.


밀도 있게 산다는 건, 어쩌면 이런 것이다.


내 안의 에너지를 허공에 흩뿌리지 않는 것. 의미 있는 곳으로 흘려보내는 것.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하는 말, 누군가의 등을 밀어주는 손, 누군가의 어둠을 밝히는 시선. 그렇게 에너지를 전달하고, 변환시키고, 순환시키는 것.


그러면 내가 사라진 뒤에도, 내 에너지는 다른 형태로 계속 존재한다.



상전이를 생각한다.


물은 0도에서 얼음이 되고, 100도에서 수증기가 된다. 같은 H₂O지만, 상태가 바뀐다. 고체에서 액체로, 액체에서 기체로. 그 순간을 상전이라 부른다.


사람도 어떤 순간, 상전이를 겪는다.


누군가를 처음 사랑했을 때.

누군가를 처음 잃었을 때.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무너졌을 때.

그럼에도 다시 일어섰을 때.


그 순간들에서 우리는 다른 상태가 된다. 같은 사람이지만, 완전히 다른 밀도로 존재하게 된다. 더 단단해지거나, 더 유연해지거나, 더 투명해지거나.

마치 날달걀이 12분 동안 100도의 끓는 물에 있다면 단단한 삶은 달걀이 되는 것처럼.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 그건 상전이의 온도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는 일이다. 미지근하게 머물지 않고, 끓는점까지 올라가 보는 것. 그렇게 형태가 바뀌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것.



반감기를 떠올린다.


방사성 물질이 원래 양의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 탄소-14의 반감기는 5,730년. 그래서 우리는 고고학적 유물의 나이를 측정할 수 있다.


사람의 기억에도 반감기가 있을까.


누군가가 떠난 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시간. 처음엔 매일 생각나다가,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1년에 한 번. 점점 희미해지는 것.


하지만 어떤 기억은 반감기가 없다.


밀도 있게 사랑했던 순간들. 뜨겁게 끌어안았던 온도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반으로 줄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는, 핵붕괴하지 않는 기억들.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열을 전달한다. 열전도. 내 손에서 종이컵으로, 종이컵에서 공기로, 열은 계속 이동한다. 멈추지 않는다.


밀도 있게 산다는 것.

그건 아마도 이런 것일 거다.


내 안의 열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

내 질량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

내 에너지를 흩뿌리지 않고 한곳에 집중하는 것.

상전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


그렇게 살다가, 언젠가 나라는 물질이 다른 형태로 변환될 때, 에너지 보존 법칙처럼 누군가의 몸속에서 계속 뛰는 것.

소멸하지 않고, 전환되는 것.


물리학은 말한다.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다만 형태를 바꿀 뿐이라고.


그러니까 지금, 이 온도를.

식기 전에 누군가에게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때 그 손의 온도를 정말로 느끼는 것.

친구가 웃을 때 그 웃음의 결이 어떤지 들여다보는 것.

슬플 땐 슬프다고, 외로울 땐 외롭다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

그리고 사랑할 땐,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

뜨겁게.

식기 전에.



백세희 작가는 떠났지만, 그의 문장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책상 위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가 남긴 다섯 개의 생명은 지금도 어디선가 숨 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여러 방식으로 남는다.



나도 그런 식으로 남고 싶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따뜻한 문장처럼.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다시 뛰는 심장처럼.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밀도 있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미루지 말고 안아주고, 참지 말고 사랑하고, 아끼지 말고 웃어주고. 그렇게 매 순간을 꽉 채워서, 언젠가 떠날 때 후회 없이, 미움 없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갈 수 있도록.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요즘 운우지정(雲雨之情)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