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에 이사를 했다. 좋게 말하면 숲세권이고, 달리 말하면 도심지에서 좀 떨어진 외곽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 아들은 처음 이사 왔을 때, 여기 시골이에요? 하고 물어봤다. 근처에 밭이 있다며. 그때마다 아파트도 있고, 건물들도 많은데 무슨 시골이야, 아니야 라고 말했었다.
물론 시골은 아니다. 간혹 밭이 보이기도 하지만.
운전대를 잡은 채 이 동네를 나가려면 몇 갈래의 길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정말 시골길 같다. 아파트를 나와 좀 지나면, 그 길이 시작되는데 차로 2분쯤이니 거리상 길지는 않다. 양 옆으로 밭이나 작은 과수원이 있고, 건물이 아주 띄엄띄엄 있다. 귀농 같은 걸 좋아하지 않아서 시골은 그저 방학 때 놀러 가던 외할머니댁 같은 곳이라 생각했다. 그런 추억만 가지면 됐지, 내가 사는 동네로는 싫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밤에 이 길로 지나가면 아주 무서울 것 같았다. 그래서 초반에는 지인들이 집에 놀러 온다고 하면, 꼭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오라고 얘기했었다. 왠지 시골 느낌 나는 곳이 좀 싫어서.
이사하기로 정하고 나서, 유치원도 알아보고 인테리어도 알아볼 겸 새 집을 오갈 일이 종종 생겼다. 그러면서 알게 된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이 참 마음에 들었다. 오가는 차선이 하나씩으로(늘 차가 막힌다) 양 옆으로 논이 있다.(시골에 가깝긴 하네, 쩝.) 동네 밖으로 나가는 방향에 있으면 파란 하늘에 큰 건물들이 보여서 뭔가 도시로 가는 느낌이 팍 든다. 그리고 반대로 동네로 들어오는 방향에 있으면, 파란 하늘에 양 옆으로 건물이 거의 없어 시원하게 탁 트이고, 저 멀리 아파트만이 보이는 아늑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어느 방향에 있든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이사 오기 전에는 꼭 이 길로만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이사를 오고 보니, 다짐과 달리 시골길 같은 전자의 길을 더 많이 다니게 됐다. 이사 오기 전에 다니던 병원을 가기 위해, 전학 오기 전의 아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거리상 전자와 후자가 비슷한 시간대였지만, 뒷길이 차가 막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앞서 말한 길을 다니게 됐다. 오전에 혼자 조용히 다닐 때는 느릿느릿 가는 것도 여유로웠지만, 아이들과 함께 약속이 있는 상태로 차도에 서있으면 시계만 보고, 발만 동동 구르게 된다. 여유 부릴 사치는 없다.
그리고 새로 알게 된 치과와 도서관도 그쪽 방향에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선택의 빈도가 잦아졌고, 나중엔 아예 다른 방향으로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그 길만 가게 됐다. 시간적 여유가 있든 없든 여지없이.
그러다, 정말 웃기게도 그 시골길 같은 길이 좋아져 버렸다.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그 길을 지날 때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짧아서 금방 큰 도로와 만나게 되어, 감상에 젖는 것도 잠깐이지만, 그래서 마음이 편안한지도 모른다. 길어지면 지루해졌을 지도.
비닐하우스도 있고, 배인지 사과인지 좀 헷갈리는(열매가 열렸을 때나 알았지, 앙상한 가지만 있는 지금은 전혀 모르겠다.) 나무도 보이고, 버스정류장도 있다. 정류장임을 알려주는 녹색 안내판과 3개가 연달아 붙어있는 주황색 의자. 다른 동네의 것과는 전혀 다른.. 정말 시골에서나 보이는 정류장 분위기다. 근데 그게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다. 운치까지 아니지만, 그냥 말 그대로 편안한 느낌이며, 아련한 기억 같은 것을 불러일으킨다. 정작 정류장에 대한 추억은 없는데, 그런 느낌이다. 뭔지 모를 아련한, 어디선가 예전에 보았던 그냥 그런 좋은 느낌.
이 기분은 뭘까. 이사 온 지 1년이 됐으니, 익숙해져서일까. 그 사이 내 감정은 왜 변한 것일까. 깔끔한 건물 하나 없는 못생긴 길이 평화롭고 조용한 길로 느껴지는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정작 그곳이 어떤 사람들과 어떤 사건들을 품고 있을지언정 말이다.
익숙해서? 다른 동네의 길과 달라서? 금세 시속 70이 기준인 큰 도로를 만나기 전의 전혀 다른 느낌의 길이라서? 현실적 불편함이 감성을 짓누를 수 없는 짧은 거리라서? 난 왜 이 길이 좋아졌을까.
몇 년이 지나 또 이사를 하게 된다면, 집이나 동네와 더불어 이 길 또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더 외곽으로 이사하지 않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