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마주한 나 _ 25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목이 먼저 건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멋진 신세계’라면, 더 나아진 삶과 더 따뜻한 내일 같은 것을 떠올리게 마련인데, 책 속의 세계는 그 반대 방향으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처음엔 배경지식 없이 읽기 시작해 자주 멈춰 섰습니다. 출생이 아니라 부화로 시작되는 인간의 삶,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말이 금지어가 된 사회, 그 모든 것이 현실감 없이 멀게 느껴졌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멀게 느껴지던 설정이 어느 순간부터 가까워졌습니다. 낯선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향하고 있는 어떤 방향을 과장해 보여주는 거울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멋진 신세계』가 보여주는 유토피아는 ‘안정’만이 존재하는 세상입니다. 질병도 없고, 죽음도 두렵지 않고, 결핍도 불안도 없도록 설계된 사회. 그곳에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낸 행복이라기보다, 애초에 불행을 알지 못하도록 길들여진 결과에 가깝습니다. 원하지 않게 만드는 교육, 질문하지 않게 만드는 습관, 불편함을 없애 버리는 체계. 사회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안정을 위해 개인이 맞춰지는 방식으로 굴러갑니다.
사람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계급이 정해지고, 그 계급에 맞는 몸과 능력으로 조정됩니다.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만 사고하고 필요한 만큼만 욕망하도록, 태아기부터 삶이 분배됩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마음이 조금 어긋나거나, 말끔한 만족감으로 해결되지 않는 감정이 생기면 ‘소마’를 먹습니다. 소마는 이 세계의 약이면서 동시에 철학입니다. 슬픔을 견디는 법을 배우기보다, 슬픔이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방식. 질문을 품기보다, 질문을 눌러 버리는 방식. 인간이 인간답게 흔들리는 시간을, 사회는 ‘관리’라는 이름으로 지워 버립니다.
이 완벽한 안락함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나는 그냥 나대로 있고 싶습니다. 울적한 나대로가 좋습니다. 아무리 즐거울지라도 타인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이 말이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 오래 참아온 기도처럼 들렸습니다. 누구나 어딘가에선 ‘나대로 있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 하니까요.
그리고 야만인 존은 더 멀리 나아갑니다.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처음엔 이 문장이 과격하게 느껴졌습니다. 굳이 위험과 불행을 원한다니, 이해하기 어려웠지요. 그런데 책을 덮고 나서 오래 남은 건 그 과격함이 아니라, 그 안에 숨은 절박함이었습니다. 존이 원하는 건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포함한 삶의 전체였습니다. 살면서 피할 수 없는 흔들림과 선택, 후회와 책임, 그 모든 것을 통과하며 ‘내 삶’이 되는 과정. 안락함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을 그는 끝까지 붙잡고 싶었던 겁니다.
이 책이 가장 무서운 지점은, 폭력으로 사람을 누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대신 ‘편안함’으로 사람을 눕힙니다.
고통이 사라진 자리엔 질문도 사라지고, 불편함이 제거된 자리엔 성장도 사라집니다. 무엇보다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라는 물음이 희미해집니다.
너무 매끈해서, 스스로 어디가 깎여 나갔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세계. 그게 『멋진 신세계』의 디스토피아가 가진 독한 향기였습니다.
읽는 동안 저는 계속 같은 질문에 걸렸습니다.
과학기술과 자본주의가 더 발전하면, 우리의 삶은 정말 더 행복해질까?
불안이 적어지고 효율이 높아지면, 인간은 그만큼 더 인간다워질까?
아마도 헉슬리가 던진 질문은 이런 것일지 모릅니다.
“너는 무엇을 대가로 편안함을 얻고 있니?”
우리가 ‘가치’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개 편안한 순간이 아니라 불편한 순간에 더 또렷해집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 선택해야 할 때, 감당해야 할 때. 그때야 비로소 나는 내가 무엇을 믿는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불행은 원치 않지만, 불행을 겪을 수 있는 자유는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자유가 있어야 기쁨도 진짜가 되니까요.
『멋진 신세계』의 핵심은 결국 이 문장으로 돌아옵니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저는 그 말을 이렇게 받아 적어 봅니다.
나는 오늘도, 조금 불편해질 수 있는 쪽을 택하고 싶다고.
그 불편함이 내 삶을 내 삶으로 만들어 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