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마주한 나 _ 26
‘돈키호테’를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읽어낸 적은 없었습니다. 두 권으로 구성된 만만치 않은 분량(전편 52장, 속편 74장)의 벽돌책. 그런데 이 작품의 진짜 위상은 ‘모험담’이 시작되기 전, 서문과 주석에서 이미 예고됩니다. “서양 최초의 근대 소설”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스페인 문학의 정점이자 유럽 문학사에서 손꼽히는 고전으로 왜 반복해서 호출되는지, 그 배경 자체가 작품의 일부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단순히 풍차와 싸우는 기사의 우스꽝스러운 일대기가 아닙니다. **‘책을 읽는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그 해석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끝까지 밀어붙인 이야기입니다. ‘읽기’가 ‘살기’가 되는 순간, 돈키호테는 비극과 희극의 경계에 서서 우리를 웃기고, 동시에 흔들어 놓습니다.
돈키호테는 자신을 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라 정체성 선언입니다. 그는 ‘편력 기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 규정에 맞는 삶의 윤리와 태도를 끝까지 수행하려 합니다. 주변의 시선에서는 현실감각을 잃은 광기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는 누구보다도 자기 삶의 규칙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의 세계는 “믿으면 믿는 대로 보인다”는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돈키호테가 단지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다르게 해석’하는 능력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실패하고 매질당하고 조롱받아도 불사조처럼 돌아옵니다. 결과를 예측하지도, 결과에 매달리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은, 현실을 이기는 힘이 아니라 현실을 의미로 바꾸는 힘입니다.
그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모든 이가 자유롭고, 네 것 내 것 구분 없이 공동소유로 조화롭고 화평한 세상. 그래서 돈키호테의 모험은 우스운 만큼이나 때로는 뭉클합니다. 시대가 조롱한 것은 ‘광기’였지만, 어쩌면 그 광기 속에는 누구나 한 번쯤 갈망하는 순수한 세계의 설계도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산초는 현실감각이 뛰어납니다. 주인인 돈키호테가 뜬눈으로 지새우며 추억으로 배를 채운다면, 산초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술도 잘 마시는 속세적 인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속세성’이 산초를 사랑스럽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섬을 다스리게 해주겠다”는 약속에 기대어 길을 나섰지만, 읽을수록 산초의 매력은 거래를 넘어섭니다. 돈키호테가 제일 잘한 일은 산초를 종자로 둔 일이라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산초는 주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끝내 떠나지 않습니다. 질책을 당해도 꿋꿋하게 자기주장을 펼치고, 무모한 주인을 현실로 끌어오려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케미는 독자에게 큰 웃음을 줍니다.
여기서 작품의 ‘근대성’이 드러납니다. 돈키호테와 산초는 단순한 주종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움직입니다. 이상은 현실로 인해 다치고, 현실은 이상으로 인해 조금씩 넓어집니다. 두 사람의 말다툼과 만담 같은 대화는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중의 답변입니다. 한쪽만으로는 삶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세르반테스는 웃음으로 설득합니다.
신부와 이발사는 누구보다 돈키호테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그의 책을 불태우고, 안전을 위해 가두고, 고향으로 데려오려 합니다. 겉으로는 ‘치료’이지만, 다른 각도에서는 공동체가 개인의 상상력을 통제하는 방식으로도 읽힙니다.
특히 ‘책을 불태운다’는 장면은 강렬합니다.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한 폭력일 수도 있고, 동시에 위험한 사유를 삭제하려는 검열의 은유일 수도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작품은 단지 개인의 광기를 조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규범이 얼마나 쉽게 폭력으로 바뀌는지, 조용히 보여줍니다.
풍차와 싸우는 장면, 양떼를 군대로 착각하는 장면, 객줏집을 성으로 착각하는 장면, 갈레라 노예를 해방하는 장면. 돈키호테의 무모하고 우스꽝스러운 모험담은 익숙하지만, 제게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갈레라 노예 해방입니다.
비록 노예를 풀어주지만, 돈키호테는 결국 뭇매를 맞고 노자까지 털리는 처참한 신세가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실패가 작품의 철학을 또렷하게 드러냅니다.
돈키호테는 말합니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자기들의 의사가 아니라 억지로 끌려가고 있다는 일이 가능한가. 하느님과 자연이 자유롭게 한 자를 노예로 하는 것은 무자비한 행위로 여겨지기 때문이라오.” (전편 22장)
이 대목에서 세르반테스가 정말로 붙잡고 싶은 가치는 ‘승리’가 아니라 자유임을 느꼈습니다. 결과적으로 돈키호테는 손해를 봅니다. 그러나 그가 건드린 질문은 남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자유는 어디까지 인간의 권리인가, 국가와 제도가 인간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는가.
돈키호테가 광기인지 신념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많은데, 바로 이런 장면에서 저는 그의 광기가 단지 웃음의 소재가 아니라 윤리의 모양으로 다가왔습니다.
세르반테스는 단순히 돈키호테만 쓴 사람이 아닙니다. 작품 안에는 모험담 외에도 단편들이 삽입되고, 소네트 등 시도 등장합니다. 마치 “나는 원래 이런 것들도 쓰는 사람”이라고, 작품 속에서 자기 문학의 폭을 끝까지 증명하려는 듯합니다.
가난과 고단함 속에서도 장편을 써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인쇄술도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이렇게 방대한 이야기와 인물들을 ‘한 세계’로 묶어냈다는 것은 단순한 재능을 넘어 집념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 세르반테스가 보여주는 통찰은, 당시의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그는 비웃음과 상처의 한복판에서 “그럼에도 인간은 무엇을 꿈꿀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돈키호테’를 읽고 나면 이상과 현실 중 무엇이 옳은지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렵습니다. 대신 더 선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믿고 살아가며, 그 믿음이 세계를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오래됐는데도 낡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감각”이라는 이름으로 꿈을 접어버린 사람에게 더 잔인할 정도로 또렷하게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믿고 있나요.
그리고 그 믿음은, 당신의 세계를 어떤 모습으로 바꾸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