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마주한 나 _ 27
한 번 읽어 본 분이라면 이상하게도 다시 펼치게 되는 고전소설이 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입니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30대의 ‘나’(화자)가 60대 중반의 조르바를 만나 함께 살아가며, 그의 영향으로 자신의 신념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과정. 그 변화의 기록이 소설 전체를 이끕니다.
그런데, 단순한 이야기인데도 왜 이렇게 매력적일까요?
카잔차키스의 수려한 문장과 크레타 섬의 풍경 묘사는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습니다. 자연이 배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처럼 독자의 눈앞에 그려집니다. 그리고 그 풍경 위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삶을 증명합니다.
화자인 ‘나’가 책으로 지식을 배우고, 이타성을 말로 외치는 지성인의 모습이라면, 조르바는 산전수전 끝에 몸으로 체득한 철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붙드는 건 늘 단 하나, ‘지금 여기’.
요즘 우리가 자주 꿈꾸는 ‘노마드의 삶’, 혹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바로 조르바가 아닐까요. 그래서 현대의 독자들은 그를 동경하고, 때로는 흠모합니다.
저는 읽는 내내 두 사람의 성격을 MBTI로 상상해 보았습니다. 화자는 내향적이고 분석적이며, 논리로 판단하면서 ‘세상의 소금’이 되고 싶어 하는 ISTJ 같고요. 조르바는 열정적이고 유연한 사고로 관계를 확장하며 살아가는 ‘스파크형’ ENFP로 느껴졌습니다. 공통분모가 거의 없어 보이는 이 둘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끝내 끈끈한 우정으로 이어지는지—이제, 화자가 이끌어가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소설은 화자가 크레타 섬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한 친구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남을 구하려 애쓰는 것이다.”
화자의 설교 같은 다짐이 이어지지만, 그는 동포를 구하자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대신 탄광 사업을 위해 크레타 섬으로 향하지요. 인생의 궤도를 바꾸기로 결심한 그때, 배 안에서 우연히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납니다.
움푹 들어간 두 뺨, 억센 턱, 튀어나온 광대뼈, 회색 곱슬머리, 빛나는 두 눈. 거친 태도와 단호한 말투.
화자는 조르바에게 묘하게 끌리고, 결국 탄광의 관리직을 맡기며 새로운 길동무로 함께 섬에 도착합니다.
65세의 노인 조르바는 수많은 경험으로 탄광 사업을 주도합니다. 무너질 듯한 갱도를 미리 감지해 광부들을 피난시키는 장면에서,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 가진 힘이 선명해집니다.
반면 화자는 탄광의 실무와 결정 대부분을 조르바에게 맡기고, 자신은 비용을 지불하는 역할에 머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사업이 성공하면 공동체를 세워 새로운 사회를 이루고 싶다는 꿈을 품지요. 그는 단테와 붓다를 탐구하며, ‘사상’의 세계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조르바는 사업의 수익을 위해 운반용 삭도 설치에 전념하고, 마침내 완성합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과 수도원 수도사들 앞에서 삭도를 운행하는 순간, 각도 계산의 오류로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전 재산을 걸었던 화자는 빈털터리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화자는 비로소 조르바 같은 자유를 맛봅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잃을 것도 없어지는 해방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둘은 각자의 삶을 찾아 헤어지고, 시간이 흐른 뒤 화자는 조르바의 죽음을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 조르바가 가장 아끼던 악기인 산투리를 자신에게 남겼다는 사실을 말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화두는 결국 **‘절대적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맘껏 누리는 상징적 인물이 바로 조르바입니다. 조르바의 관심사는 늘 단순합니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 그에게는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불안도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진정한 카르페디엠처럼 보입니다.
그는 구속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화자와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말하지요.
“일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 하겠지만, 다른 일을 억지로 시키면 관계를 끊겠다.”
자신은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선언입니다. 물론 그의 자유를 얻는 방식은 때로 극단적이어서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버찌를 좋아해서 아버지 돈을 훔쳐 토할 때까지 먹고 버찌를 끊어버린다든가, 도자기를 굽다가 손가락이 거추장스럽다고 손가락을 자르려는 장면은 독자를 당황하게 합니다.
하지만 조르바는 단순히 방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진면목은, 오히려 위태로운 순간에 드러납니다. 마을 남자들이 과부를 희생양 삼아 폭력으로 몰아갈 때, 그 흐름을 막으려 나서는 사람도 조르바뿐이었습니다.
또 크레타 섬에서 여인숙을 운영하는 오르탕스 부인과의 관계에서도, 그는 그녀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진심으로 정성을 다합니다. 표면적인 ‘여성관’만으로 조르바를 단정하기엔, 그의 삶에는 더 복잡한 결이 있습니다.
조르바는 삶에서 굳이 ‘왜?’를 붙들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충실하라.”
춤추고, 산투리를 연주하고, 살아 있다는 감각을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람. 죽음 앞에서도 자유를 놓지 않으려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는 마지막 장면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삶을 완주했는지 보여 줍니다.
단테와 붓다를 탐구하던 화자는 회고합니다.
조르바에게 가장 간단하고 가장 필요한 질문을 받았는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고.
화자는 책에서 영혼의 멘토를 찾으려 했지만, 조르바는 길 위를 떠돌며 삶 자체로 배웠습니다.
그는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미래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몸으로 증명합니다. 눈을 뜨는 순간 나를 맞이하는 자연, 사람, 사물들. 그 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매 순간을 환희로 보는 것이 어쩌면 ‘가장 잘 사는 길’일지도 모른다고, 조르바는 말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조르바의 자유분방함과 화자의 지적 탐구심 사이에서, 결국 균형의 삶을 찾고 싶었습니다.
생각으로만 살지 않되, 생각을 버리지는 않는 삶.
자유를 꿈꾸되, 삶을 책임지는 방식으로 자유를 실천하는 삶.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 질문을 독자에게 조용히 남깁니다.
당신의 ‘지금 여기’는, 오늘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