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은 사뭇 충동적이었다. 애초에 여행 계획 같은 건 없었는데, 텔레비전을 보면서 채널을 돌리는 과정에서 하롱베이의 풍경이 손목을 잡았다.
" 우리 저기 안 가 봤잖아?"
이런 말이 나오면서 충동적으로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이미 2월도 하순으로 접어든 시간. 3월은 남편이 바쁜 달이다. 2월 중에 여행을 가려하니 딱 하루, 예약 가능한 날이 있었고, 무조건 예약했다. 뭐, 그냥 가면 되지. 건강이 늘 조심스러운 사람인데 며칠간 반짝반짝하는 몸상태를 생각하며 기분이 좋을 때 얼른 다녀오는 게 매우 괜찮은 결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말이지, 그런 생각이 건방졌던 건지 감기 증상이 시작되어서 초기에 잡자는 생각으로 약을 처방받았다. 며칠 약을 먹고 나니 속이 쓰리고 아프다. 내과에 가서 위장약을 받아오고 이틀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로 누워 지냈다. 출발이 이삼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여행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고민이로다.
여행 당일 캐리어를 꺼내고 옷장을 뒤져서 지난여름에 입었던 옷으로 짐을 쌌다. 4년 전, 이맘때 베트남의 남부 지방인 호찌민과 무이네를 갔을 때 여름옷을 입었었고,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던 기억을 떠 올리며 준비를 했다. 그러나 조금은 준비성이 있는 척을 하면서 인터넷으로 베트남 날씨를 검색했다. 북부지방인 하노이 여행객의 블로그를 읽으니 날씨가 싸늘해서 긴 옷이 필요하다고 한다. 여행사의 안내문을 보면 아침저녁 쌀쌀하니 경량패딩 하나 준비하라 한다. 베트남에서 패딩을 입는다고?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다. 계절에 따라, 계절과 계절 사이인 환절기에 따라 옷을 입는다. 옷 종류가 참 다양하다. 봄과 가을의 분위기에 맞추어서 옷색깔까지 구분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날씨의 변화를 따라가는 옷들이 옷장에 가득하다. 비록 옷을 입으려면 입을 옷이 없다는 생각은 들지만 말이다. 베트남은 더운 나라다. 열대기후의 정글에 베트콩이 출몰하고 아오자이 아가씨들이 있는, 일 년 내내 무더위가 계속되는 나라. 내가 생각하는 베트남이다. 싸늘해봐야 봐야 여름날씨지. 땀 냄새 풍기지 않게 여러 벌의 여름옷을 캐리어에 담았다.
한국의 추운 날씨에 맞추어서 출국할 때는 경량패딩을 입고 나갔다. 밤 시간, 하노이의 노이다이 공항에 도착했는데, 이게 뭐지? 싸늘한 바람이 휙, 분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겨울 같다.
"추워."
처음 만난 여행객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 그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지금, 베트남은 겨울입니다. 3월이 되면 점점 더워지기 시작합니다."
친절한 가이드님의 말이 이상하다. 겨울이라고? 그랬다. 내가 경험한 우리나라 겨울 날씨는 아니더라도 베트남의 2월 날씨는 싸늘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경량패딩을 입고 있었다.
여행 중에 캐리어의 옷은 거의 꺼내지 않았다. 반소매 티셔츠에 토시를 하고 바람막이 두 개를 껴 입었거나, 갈 때 입고 간 경량패딩으로 여행을 했다. 하루는 가져간 여름 긴 바지를 입었지만 추워서 입고 갔던 겨울바지로 바꿔 입고 여행을 했다. 아, 가져간 레깅스 입고 치마도 하루 입었다. 단벌신사 남편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다양한 패션이지 않았나? 비상용으로 준비한 부피가 작은 팔토시와 레깅스가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잠시 들린 야시장에서 옷을 사 입었다는 여행객도 있었다. 명품 이름을 달고 온갖 가품이 즐비한 시장에서 고른 옷이 예뻐 보였다. 무엇보다 기모가 들어간 옷이 저렴한 가격으로 따뜻한 여행을 만들어 줄 것 같아 부러웠다.
비록 춥다는 말은 많이 했지만, 여행은 즐거웠다. 걱정과 달리 긴장 때문인지 몸도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속만 편하면 무엇이든 먹는 건 가리지 않으니 음식도 좋았다. 다만 열대 과일 먹는 건 조심스러워 맛만 보는 걸로 만족했다.
패키지여행은 지유여행보다 여행지에서 겪는 부딪침이 적다. 알아서 스케줄 잡아주도 데려다주고 관광지와 먹을거리와 숙소도 다 책임져준다. 적당히 설명도 해주기에 좋은 가이드 만나고 별난 성격을 가진 여행객을 만나지 않으면 대체로 여행은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다행히 좋은 가이드를 만났고, 우리 일행들도 서로에게 웃음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을 만나 여행 내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다. 비록 "춥다" 소리는 많이 했지만 그건 여행을 하며 겪은 기억에 남을 에피소드 중에 하나다. 에피소드는 예상하지 못 한 일에 적응하며 고정관념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시간의 경험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크고 작은 경험들이 내 무의식 속에서 조용히 편집이 되어 오늘의 고정관념을 만들었다. 아주 오래전, 언니 오빠들이 파월장병에게 쓰던 위문편지에 대한 기억 속의 월남(베트남)은 더운 나라였고 정글의 나라였다. 그 작은 지식이 지금까지 고정되어 있다. 이전에 갔었던 두 번의 베트남 여행도 무더위 속에서 땀을 흘리며 다녔고, 숙소의 수영장이나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는 여행이었다. 동남아는 일 년 내내 더운 나라라는 게 내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베트남이 지금은 겨울이라 현지인들은 패딩을 입고 여행객은 얇은 옷을 입었다는 블로그들의 여행기를 읽으면서도 내 생각대로 여름옷을 깨리어에 가득 담았던 것이다. 베트남의 지도를 보면서 나라가 참 길다는 생각은 했는데, 그렇기에 지역마다 기온의 차이가 있을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베트남은 더운 나라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다. 객관적 사고를 잘한다는 건방진 생각 속에서 결정하는 잘못된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일상을 벗어난 새로운 환경으로 떠나는 여행. 비록 패키지의 짧은 여행이지만 그 속에서도 내 생각이 언제나 옳은 생각이 아닐 수 있다는 걸 배운 여행이었다. 일 년 내내 무더운 나라, 벼를 이모작 삼모작 하는 나라지만 추운 날도 있다는 걸 알았다. 여행 내내 햇볕 한 번 보지 못하고 가랑가랑 보슬보슬 이슬비가 오락가락하면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여행지를 걸으며, 낯선 시장 사람들 틈에 앉아 이름도 모르는 현지 음식을 맛보며 즐기던 며칠. 어쩌면 다시는 가보지 못할 그 거리들이 그리워진다.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