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항재를 넘다
겨울의 긴 추위가 계속된다. 먼 옛날 어린 시절보다는 훨씬 덜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하물며 입고 다니는 겨울옷들이 예전보다 따뜻함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여전히 춥다. 추우니 몸은 웅추려들고 집에만 머무르게 된다. 거기에 더해 감기에 걸린 몸이 쉽게 회복되지도 않으니 자꾸만 이불속에 누워 낮시간 동안도 방에서 뒹군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은 생각으로 그치고 만다. 매일 나가던 운동도 운동장에 추울 것 같아 나가지 않는다. 편하니 좋긴 한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고 개운하지가 않다.
"우리 태백산과 만항재 가 볼까?"
가고는 싶지만 나이 들어가는 남편을 바라보면 해마다 모습이 변해가는 것 같아 피곤할까 봐 쉽게 장거리 운전에 동의하지도 못하겠다. 그러나 여행 좋아하는 남편을 바라보다가, 기분전환으로 바람 쐬러 나가야겠다고 생각을 바꿔 주섬주섬 웃을 갈아입엇다. 창을 열어 치악산을 바라보니 산에는 눈이 쌓여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일단 떠나보기로 한다.
영월 상동과 정선 고한의 연결점에서 태백으로 넘아가는 길목에 만항재가 있다. 1330m까지 차가 올라간다. 우리나라에서 차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다. 일제강점기부터 석탄산업이 호황을 이루다가 사라져 간, 1980년 때까지 광산이 많았던 지방이라 석탄을 실어 나르던 길이다. 운탄고도의 한 곳, 만항재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경치도 좋고 야생화가 많아 관광객들이 찾아가고, 겨울에는 상고대가 아름다운 곳이다. 차를 타고 올라가 함백산 정상 아래, 굽이굽이 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보는 눈꽃세상은 참 아름답다. 다만, 밤과 낮의 기온차가 심해 상고대가 많이 피는 날이면 그렇다는 거다. 매일 상고대가 피는 건 아니다. 그냥 차가운 겨울산인 날도 많다. 운이 좋으면 예쁜 겨울산을 볼 수 있겠지.
영월을 지나가면서 눈꽃세상은 포기했다. 여기쯤 오면 산이 하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냥 마른 산을 바라보면서 하얀 눈꽃은 포기했다. 여행이라는 게, 내 기대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여행지의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 내 바람대로 풍경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정선의 고한과 영월의 상동이 만나 태백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만항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중 하나인 정암사를 지나고, 지금은 휴관 중이지만 예전에 삼척탄좌였던 삼탄아트마인을 지나고, 한 때는 많은 주민들이 살았었던 만항마을을 지나 함백산을 바라보면서 깜짝 놀랐다. 두꺼운 등산복에 배낭을 멘 등산객들이 엄청 많다. 일요일이긴 하지만 414번 지방도롤 이어지는 도로가에 관광버스들이 줄을 지어 주차되어 있다. 강추위가 연일 계속되는 상황에, 추운 지방인 태백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온 것이다. 만항재가 가까워지면서는 색색의 프리스틱 눈썰매를 등에 지고 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야생화 공원의 비탈길을 걷고 있다.
해발 1330m 만항재에 도착하니 주차 공간이 없을 만큼 차들이 많고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이 가득하다. 기온은 많이 내려가 있다고는 하지만 햇살이 화사하고 바람이 없으니 추위도 모르겠다. 따사로운 햇살아래서 괜한 웃음이 나온다.
"와우, 오길 잘했어. 상고대는 없어도 겨울 산의 정취가 가득하잖아."
바닥에는 눈이 쌓여 있고, 나무들은 마른 가지를 쭉 뻗고 있는 숲길에는 햇살이 가득 내린다. 눈 쌓인 숲길을 걸으면서 하늘을 보니 파란 하늘이 더 겨울 같은 차가운 느낌이지만, 나무들의 마른 줄기의 앙상함에 더 바람이 많이 불 것 같지만 마음은 결코 춥지 않은 숲길이다. 등산화가 아니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눈썰매 도구를 준비해 와서 눈썰매를 타는 가족들 옆을 지나면서 오히려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겨울 산이다.
슾 속에서 함백산의 정상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6번째로 높은 1567m 높이의 함백산. 비록 등산화조차 신지 않고 온 여행이라 함백산의 정상을 바라보고만 있다. 한 때는 산을 즐겨 다녔다. 10여 년 전 겨울, 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과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3 계절을 보내고 맞았던 겨울, 몸도 마음도 다 지쳐 있었던 그때, 무슨 용기로 함백산을 올라갔는지 모르겠다. 병들기 전, 등산을 자주 다니긴 했지만 시어머님 병 수발을 드느라 한 계절을 병원에서 보냈다. 어머니 돌아가신 달에 내가 암진단을 받고, 검사와 수술과 항암과 방사선 치료로 일 년이 지나갔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자주 가던 등산길. 그때의 힘이 다시 찾아가려 등산을 감행했었겠지만, 그 당시 나는 수술 후유증으로 한쪽 팔을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무거운 배낭을 지고 등산을 했다. 하얀 사슴뿔 같은 나무줄기들이 가득한 상고대 터널을 지나면서 하늘과 맞당을 듯이 높은 정상에 올라 세상을 다시 얻은 듯이 즐거웠던 날이다. 힘들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다시 등산을 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이 기뻤던 것 같다.
하얀 겨울산이 참 아름다웠다. 이파리 하나 없는 갈색의 나뭇가지들만 있어서 바라보면 능선 위에 줄기들만 가득한 산. 그게 겨울 산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디고 견뎌 봄이 오면 다시 새싹을 만들어 내는 겨울산. 항암치료로 머리카락 하나 없는 민머리는 모자를 써도 머리가 시리다. 손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그 위에 모자를 쓰고 다니던 시간이 지나고 머릿카락이 조금 자랐었다. 털모자를 쓰고 온몸을 완전무장한 등산복에 배낭을 메고 올랐던 함백산에서 겨울 산의 힘을 생각했었다. 찬 자람 부는 겨울이 지나가면 다시 초록이 가득한 울창한 산으로 변할 것이니, 겨울산 같은 민머리의 시간도 이겨내면 내 삶은 다시 활기찬 시간이 올 것이라는 발원지도 알 수 없는 용기가 치솟던 겨울등산. 만항재에서 함백산을 바라보며 참 용감했던 그 시절의 어느 날을 생각했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난 지금은, 등산의 꿈은 접었다. 이제는 무리하지 않는 여행을 진행 중이다. 만항재의 겨울 모습을 보러 오는 것처럼 차를 타고 오르거나, 스키장의 관광용 곤돌라를 타고 산 정상에 올라 겨울 산을 감상하는 시간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하다. 오래전, 할 수 있다는 기대와 성취의 즐거움에 빠져서 찾아가던 겨울 산을 이제는 이렇게 차를 타고 찾아와 잠시 숲길을 걸어 본다. 이만큼이라도 할 수 있는 지금. 숲길을 걷고, 따뜻한 음식을 먹고, 산 위나 산중턱의 카페에 앉아 능선을 바라보면서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시간에서 더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이제는 나이가 나를 다둑이며 욕심을 접는 정리를 가르친다. 가끔은 울뚱불뚱이며 저항할 때도 믈론 있지만, 많은 부분을 이제는 조용히 내려놓고 갈 수 없는 시간 속의 추억은 그리움으로 돌아본다.
만항재를 내려와 태백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산 중턱에 콘도와 함께 운영하는 레스토랑 겸 카페가 있다. 인적 드문 산 중턱이라 바라다보이는 능선이 아름답고 둘러싸인 높은 산이 만드는 경치가 참 아름다운 곳이다. 어느 해 지나다가 우연히 들렸던 곳인데 조용하고, 정성 담긴 상차림에 음식이 깔끔하고 맛있었던 기억이 남아 그 식당에 들렸다.
"여기 좋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남편과 둘이 마주 앉아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한식 좋아하는 남편은 산채비빔밥을 먹었고, 집에서와는 다른 음식을 먹고 싶은 나는 돈가스를 먹었다. 말이 적은 여자라 음식 먹는 일에 열중하면서 잠깐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 산의 능선을 바라보면서, 내년 겨울 여길 또 오고 싶다는 작은 욕심을 꿈꾼다.
사계절을 사노라면 우여곡절도 많고 버티기 어려운 날도 있지만, 소소함 속에서 느끼는 작은 웃음이 남아 살아가는 일에 불끈 힘이 솟는다. 일상에서 벗어나 집을 떠난 하루의 여행. 단 하루지만 그 하루 속에 지난 시간 속의 많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겨울바람을 이겨낸 지난 시간을 대견해하는 날이었다.
돌아오는 길, 인터넷을 검색해서 태백의 알프스 같다는 산양 목장이 있는 산 중턱의 카페의 젊은이들 사이에 앉아 따뜻한 음료를 한 잔 했다. 그리고 작은 욕심을 다시 만든다.
'겨울이 만드는 휴식의 시간이 지나 초록이 가득한 목장의 봄과, 여름과 가을을 만나러 다시 꼭 올 거야.'
아무리 작은 욕심이라도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지켜야 할 숙제가 있다. 늘, 건강관리를 잘 해야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