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길

진부장에서

by 순미




3월에 늦은 눈이 내린 날, 대관령을 갔다가 눈구경도 하지 못하고 주차장에서 차가 눈 속에 빠진 채 움직이지 못해 고생만 했다. 눈이 쌓인 산을 구경도 나서기 전에 몸이 지쳤다. 그러나 눈 쌓인 산 경치가 무척 아름답긴 했다. 추운 날씨라 눈 쌓인 산자락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 찍고 진부로 나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식당 옆의 진부장에 나갔다.


진부에는 오일장이 선다. 3일과 8일장이다. 진부시장이라는 간판을 보았지만 사람이 없어 행인에게 물었다. 진부장이 여기냐고.


"여기가 맞아요. 그런데 한 사람도 안 나왔어. 눈이 내려서."


예상했던 대로 장날이지만 사람 없는 장날이었다. 그래도 지방의 명동 같은 기분이 들게 상가들이 있어서 사람 없는 시장을 둘러보았다.


시장 옆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진부장에서 학교가 이렇게 가깝던가?


아득히 먼 옛날이 떠 올랐다. 사람의 첫 기억은 언제부터일까? 내 기억의 첫 장소가 진부인지도 모른다. 아주 어린 시절 살았던 진부. 아련히, 어쩌면 편집된 기억일지도 모르지만 떠 오르는 기억은 아주 어린 시절이다. 아마도 4살이나 5살쯤일까? 혹은 6살이었을까?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초등학교(국민학교)가 있었고, 그 옆에 작은 동네에는 집이 몇 채 있었다. 지붕은 하나여도 여러 가구가 살았던 집이다. 그 옆으로 밭이 있었고 그 건너에는 신작로가 있었다. 신작로란 단어도 그 시절에 처음 배웠다. 신작로란 단어를 들으면 지금도 어렴풋이 그 동네가 떠 오르곤 한다. 신작로를 걸어 처음 가본 시장. 초등학교에서 한참을 걸어 나와야 가게가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어린아이가 한참을 걸어야 얼마를 걸었겠나. 운동장 저 건너편 마을도 가보지 못한 어린아이 걸음으로 한참을 걸었다고 해도 결코 먼 거리는 아니었을 거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걸음이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초등학교에서 한참을 걸어 나와야 시장이 있다고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이제 보니 진부장에서 학교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구나. 이럴 수가.


눈이 내려 사람 없는 시장에서 옆에 있는 초등학교를 바라보다가 그 시절 시장이 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거란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되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60년 동안 나의 진부는, 학교가 있고 한참을 걸어 나가 가게가 있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진부를 가게 되면 그 가게를 찾아보고 신작로를 따라 먼 시장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가끔씩 하곤 했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변해 아무리 농촌 지역이라도 세상의 흐름 따라 변했을 텐데 말이다. 눈길을 걸으면서 서너 살의 어린아이 걸음과 서너 살 아이가 보았던 맑고 깨끗한, 백설 같았던 세상이 그리워진다. 이미 편집되어 그때의 기억을 온전히 할 수는 없고 말았지만, 이제는 갈 수 없는 그 먼 옛날의 아름다웠던 세상이 그리워지고 가슴에 살며시 눈물이 고이는지 뭉클해지는 날이었다.


하얀 눈이 덮인 진부 시장. 시골 오일장 구경을 나섰다가 사람 많고 물건 많은 왁자지껄한 장구경은 하지 못했지만 하얗게 눈 덮인 조용한 시장을 한참을 걸었다. 진부장 옆의 초등학교를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렸듯이, 이날의 하얀 겨울 풍경도 먼 훗날의 어느 날에는 예쁜 추억으로 기억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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