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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Oct 27. 2019

열심히 말고, 잘하고 싶어서 내가 한 것들

느낌적인 느낌이 아니라, 일을 잘한다는 건 뭘까

우리 팀 부장은 회사에서 인정받는 직원이었다. 출중한 능력으로 두 번의 특진을 했고 8년 만의 부장 타이틀을 거머쥐며 사내 대표 에이스로 꼽히는 공채 1기.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가 많았지만 나는 일개 AE 나부랭이었기에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이름과 직급 얼굴 정도랄까. 


어느 날 그의 목소리가 파티션을 넘었다. 얼마 전 새로 계약한 외주 디자이너의 업무 미숙으로 프로젝트 진행이 더뎌지자 차장과 방안을 모색하는 듯했다. 부장은 차장의 입사 시절 사수였다. 그래서일까. 평소 말이 없던 부장도 낯설게 한껏 격양돼서는 이야기를 이어갔고 그의 목소리 중 한 마디가 내 귀에 박혔다. 


“아니, 열심히 하는 거 말고.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한 거고. 잘해야지. 봉사해? 

돈 받고 일하는데 퀄리티가 잘 나와야지.”


사회생활을 하며 스스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난 왜 심장이 쿵쾅 거렸을까. 이제 막 적응을 시작하는 내가 스스로 미덥지 못한 나날들이었기 때문일까. 당황스럽게 떨리는 손가락을 진정시키며 다짐했다. 


‘그래, 열심히 말고 잘할 거다. 두고 봐.’


(출처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中)



#닥치고 열심히는 하는 건 공부, 일은 우선순위로 효율적으로


다짐이 무색하게 일을 잘한다는 건 열심히 한 다는 것과 결부되어 있었다. 더 당혹스러운 건 내가 200프로 노력해서 더는 디벨롭이 안 되겠다 싶을 정도의 결과물을 가져가야 그나마 상사에게 흡족한 수준이라는 거였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뱁새의 고통이 이런 걸까.  


그래서 시작한 게 업무계획표였다. 진부한 대안이었지만 적어도 이 회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입사 첫날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업무보고가 없다는 거였다. 이전 회사는 근무 시작 전 40분 단위로 표가 그려 있는 업무계획표를 작성해 팀장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서를 쓰는 것도 시간을 꽤나 잡아먹어서 업무 시작시간을 이때부터로 해야 한다며 툴툴대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니 그보다 효율적인 업무관리 방법이 없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네이버 메모장을 열고 그날 해야 할 일을 프로젝트별로 적었다. 진행 시간도 기재해 내가 이 업무를 하는데, 얼마의 시간이 소요되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뿐인가. 프로젝트 3개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는 내 업무 과다를 설득력 있게 상사와 논의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각 업무를 20분 단위로 쪼개서 계획을 해도 그 날 안에 퇴근할 수 없는 지경이다 보니, 업무의 효율적 분배를 담당 팀장에게 건의할 수 있었다. 근거 없는 건의는 상사에게 징징거림으로 들릴 뿐이고 즉각적인 개선을 기대할 수 없다. 



#한 번 하면 실수, 두 번 하면 실력 


내 주요 업무는 보도자료 작성, 월간 플랜 작성, 월간 보고 작성, 인터뷰 피칭 자료 작성 등등… 주로 무언가를 쓰는 일이다. 하루 종일 모니터와 씨름하고 있으면 내가 글을 쓰는 건지 손가락이 글을 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여기에 상사와 고객사의 피드백이 더 해지면 내용은 더 갈 길을 잃기 십상이다.


여느 때처럼 업무가 휘몰아치던 날이었다. 보도자료 초안을 작성해 팀장에게 보고했고 30분쯤 지났을까 자리로 오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팀장의 자리에서 모니터로 다시 본 나의 초안은 꼭 내가 쓴 게 아닌 것만 같았다. 분명 팀장이 얼마 전 나에게 주었던 피드백들, 예를 들면 리드 단락은 짧게 쓰고 관계자 멘트는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식의 것들이 하나도 반영되어있지 않았다. 


(출처 : tvn 드라마 - 미생 中)

당황스러웠다. 나도 결국 바쁘다는 핑계로 꼼꼼하게 일처리를 하지 않는 그런 직장인이 되어버린 걸까.


자리로 돌아오니 자괴감이 몰려왔다. 모두가 퇴근하고 엑셀 파일을 열었다. 체크리스트를 만들기 위해서다. 일종의 오답노트 체크리스트라고 할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스스로를 믿지 않기로 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나에게 엄격하리라. 그러면 다른 사람이 나를 믿고 너그럽게 대해주지 않을까. 

 


#쉬운 사람이 되면 무시받지만, 쉬운 후배가 되면 선택받는다.


난 다가가기 쉬운 인상은 아니다. 또 사람 간의 관계에 선이 있고 그 선이 지켜져야 편안함을 느끼는 스타일이다. 이 쪽 업계에서 썩 바람직한 성향은 아니지만 천성이 그런 건 뭐 어찌하겠나. 


하지만, 다가가기 쉽지 않은 후배가 되는 게 한창 일을 배워야 하는 내 입장에서 도움이 될까? 이 회사는 부장과 팀장이 인력 배치를 한다. 더불어, 기술직이 아니기 때문에 싫든 좋든 담당 선배 혹은 상사로부터 도제식으로 업무를 배우게 된다. 즉,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인지라 개인에 대한 친밀도가 업무 성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뭐, 이쪽 업계뿐 아니라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 어느 정도는 비슷할 수 있겠다.


성격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연기를 할 수는 없다. 고객사 눈치, 매체 눈치, 외주사 눈치 등 중간자 입장에서 온갖 눈칫밥으로 단련되어온 이들에게 내 연기 따위 금방 탈로 날 거다. 그렇다면 진짜 마음을 고쳐먹는 수밖에.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적어도 일을 같이 하기 쉬운 사람으로라도 느껴져야 함께 일할 맛 나는 동료 혹은 후배로 여겨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쉬운 후배, 쉬운 동료가 되는 것은 어려운 길이었다. 일을 시키기 쉽다는 건 마음이 편해서 요청하기 쉽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상대의 신뢰가 가는 업무 능력을 바탕으로 효율적인 업무 진행이 가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포인트는 ‘신뢰가 가는 업무 능력’이다. 속된 말로 ‘척하면 척, 개떡같이 말해도 찰 떡 같이 알아듣는, 1을 알려주면 10을 완성하는’ 그런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다. 


마음을 먹었다고 단번에 저런 어마 무시한 능력이 생길 리 없었다. 그저 동료들과 비슷한 수준의 지식, 백그라운드가 쌓일 수 있도록 많은 프로젝트를 통해 부딪치고 이야기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경험에는 왕도가 없다. 해서, 나는 동료들에게 쉬운 후배가 되어 더 많은 경험의 기회를 얻고 싶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발까지 알게 하라


흔히 우리는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만약 내가 수상을 했다거나 연봉이 올랐다거나 하는 좋은 성과가 있다면 동네방네 이야기하고 싶겠지만 겸손의 미덕을 따를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적이 많아지니까. 우리 선조들도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 이유는 괜한 시기 질투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 감히 나는 추측한다. 


(출처 : tvn 드라마 - 로맨스는 별책부록 中)

                                                    

그런데 업무는 다른 문제다. 업무는 과정 그 자체다. 과정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언제든 보완될 수 있고 나는 부하직원으로서 더 나은 방향에 대해 피드백받을 권리가 있다. 상사가 돈을 더 받는 이유는 경험과 노하우를 토대로 부하직원의 업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이메일을 프로젝트 관련자 모두에게 보낸다. 직접 컨펌을 받지 않는 부장, 팀장이라 할지라도 참조에 넣어 이메일을 보낸다. 보통 실무자들은 관리자들이 수신하는 메일이 많고 메일함 용량도 항상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결재 건이 아닌 경우 굳이 메일을 보내지 않는다. 하지만, 난 항상 그들을 참조에 같이 넣었다. 내가 이렇게 일을 많이 한다고 생색을 내고 싶어서가 아니다. 어차피 그들의 눈에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그저 누구나 그 자리에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보일 터다. 


다만, 난 내 보고서를 컨펌하는 팀장이 좀 더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했으면 했다. 물론, 팀장은 이미 완벽했다. 하지만 팀장도 중간 관리자이기에 최종 결정권자가 업무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면 좀 더 빠른 컨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상사의 업무 진행이 편해진다면 당연히 나의 업무 진행도 수월해진다. 나아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더 많은 경력자가 봐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내 업무 능력 향상에도 좋은 기회임에 틀림없었다. 



#나무도 보고 숲도 봐야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벌써 1년이 지났다. 다시 시작한다는 설렘도 경력직의 설움도 희미해졌다. 1년 사이에 난 의류, 제약, IT 기업의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네 번의 제안에 참여했다. 회사에 동기가 없는지라 애초에 비교할 대상도 없지만 스스로 봐도 시간 대비 폭풍 성장이었다. 적어도 빠르게 적응은 마친 것 같다.


폭풍 성장의 배경에는 힘든 팀 분위기도 한몫했다. 입사가 확정된 후 회사에 재직 중인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축하 겸 경고의 메시지였던 것 같은데, 그때는 일을 더 배울 수 있을 거라는 해맑은 생각만 했다니. 나도 여간 단순한 게 아니다.


"그 팀 항상 불 끄고 퇴근하는 팀이야.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도 다 회사에서 내로라하는 일 잘하는 사람들이야. 배울 게 많은 분 들이라 일 욕심 있는 너한테 득이 될 것 같긴 해.


선배의 말은 단 하나도 틀린 구석이 없었다. 매일 불 끄고 퇴근해 경비아저씨랑 안면을 트게 됐고 덕분에 1년이 지나니 회사는 물론 업무 흐름을 빨리 파악할 수 있었다. 흐름을 파악한 다는 건 꽤나 중요하다. 예상하고 계획해 업무효율을 배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2015.09




돌이켜보니 내가 입사 초기에 했던 것들은 일을 잘하기 위한 필살기라기보다 제대로 하기 위한 습관 들이기 정도였던 듯하다. 재밌는 건 요즘 나의 고민이 '일을 잘한다는 건 뭘까'라는 거다. 


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결국 제자리걸음인 셈. 한 마디로 정의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렵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어려워지는 기이한 난제에 부딪힌 기분이다. 기어코 대답을 하고 나면 그 또한 그저 '느낌적인 느낌'일뿐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우선 '열심히 하는 것'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다. 은퇴할 때쯤에는 알 수 있기를 막연히 기원하며 오늘도 일을 최소한 열심히 시작해본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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