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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Oct 20. 2019

차라리 신입사원이었으면, 경력직의 설움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아는 척, 오늘도 경력직은 웁니다.

PR 에이전시 2년 차 AE로 이직했다. 기업 홍보팀에서 근무한 경력을 내세워 홍보 좀 해본 것처럼 면접을 본 덕분이다. 지난 기업에서 보낸 1년 8개월이라는 시간을 날리기 아쉽고 연봉도 지켜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기업 홍보팀과 PR 에이전시의 업무 영역이 다를 것이라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가라고 있는 거고 각오는 무너지라고 하는 것 이어서 일까, 생각보다 시련은 빨리 찾아왔다.



#AE는 Almost Everything의 약자라더니


유명한 짤이 있다. 개그맨이 눈을 뒤집어 깐 표정에 해골 이모티콘과 함께 ‘Ah, 이것도 제가… Eh, 저 일도 제가?’라는 자막이 있는 이미지다. PR 에이전시 직원의 업무 영역이 부르는 게 값이라는 업계 관습을 자조적으로 보여주는 콘텐츠다. 학부 때는 단톡방에서 공유하며 까르르 거릴 이미지에 불과했건만, 이제는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AE의 공식 명칭은 Account Executive다. 프로젝트의 임원. 즉, 실제적으로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인력을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대부분 AE라 불리는 이들은 사원 나부랭이라는 거다. 직급도 직책도 없고 사회에서는 초년병이요 조직에서는 신입 혹은 2-3년 차 사원들이 해당한다. 이는 홍보 업계의 인력 관리 시스템이 상급자 중심이기 때문이다.


체계적으로 보이는 이 시스템에는 함정이 있다. 결과적으로 프로젝트에 일을 하는 사람은 먹이사슬의 맨 밑에 있는 AE 하나라는 거다. 뿐만 인가, AE 한 명의 노동력을 A라는 프로젝트에 50% B라는 프로젝트에 50% 넣는 걸로 계획한다 한들, 결국 AE 한 명이 두 프로젝트를 집행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쉽게 말해 나와 같은 AE들만 죽어나는 구조였던 거다.


출근 첫날, 홈쇼핑 대기업의 미팅에 참석했다. 초짜인 걸 티 내지 않으려 잔뜩 긴장한 나를 뒤로 한 채 고객사 대리가 요구사항을 쏟아냈다.


“이번에 F/W 신상품 화보를 메인 모델인 000 씨랑 촬영할 예정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화보 촬영 현장에 연예 정보 프로그램을 어레인지 해서 브랜드를 노출시켰으면 하는데요. 가능할까요?”


얼마 전까지 기업 홍보팀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알고 있었다. 답은 정해져 있다는 걸. 고객사에서 저렇게 구체적으로 요구할 정도면 위에서 지시를 받았거나 이미 위에 보고가 된 사안이니 진행을 해야 하는 건이다.


문제는 PR 에이전시에서 원래 이런 일도 하는지를 내가 모르겠다는 거다. 그리고 더 문제는 내가 이걸 몰라도 되는지 여부도 모르겠다는 거다. 하, 천하의  르넷이 이렇게 작아지나. 하는 수 없이 동석한 팀장에게 갈 곳 잃은 두 눈으로 구호의 시그널을 보냈다. 내 눈빛을 읽은 그녀는 나 대신 대리와 이야기하더니 금주 중으로 연예 정보 프로그램을 어레인지 하겠다고 했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한 걸 보니 팀장은 팀장이다. 짬밥은 그냥 먹는 게 아니다.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메일 한 통이 왔다.


안녕하세요, 르넷.


첨부된 리스트 확인 후 연예정보 프로그램 작가에게 컨택하시어 차주 화보 촬영 인터뷰 어레인지 바랍니다.

금일 퇴근 전까지 진행상황 보고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드림.


리스트가 있다니, 역시 원래 해오던 업무의 일환이었나 보다. 괜스레 마음이 놓여 서둘러 한 연예 프로그램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작가는 회사 이름과 브랜드 이름을 몇 번은 되묻더니 모델이 000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내 말을 들어주었다.


작가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다음 주 촬영을 지금 제안하는 경우가 어디 있냐며 쏘아붙이고는 검토 후 전화 주겠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얼굴이 붉어져 쉽사리 다음 후보 작가의 전화번호를 누를 수 없었다. 거절을 넘어 잡상인 취급을 당한 느낌. 수모를 당한 감정이랄까.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는 사무실에서 염소 마냥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할 것 같아 휴대폰을 들고 회사 옥상으로 향했다.



( 출처 : tvn 드라마 - 미생 中)


옥상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전화를 걸어 이야기할 내용을 적었다. 누가 보면 발표 스크립트라도 외우는 것 마냥 중얼중얼 거려 입에 익힌 후 심호흡을 하고 겨우 다음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결과는 다행히 긍정적이었다.


입사 첫날부터 무언가 해낸 것 같아 뿌듯한 마음도 잠시 어깨가 축 처졌다. 이 더운 한 여름에 옥상 구석에서 이게 뭐 하는 건가.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와 팀장과 사수 선배에게 회신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어레인지 한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택시에서 선배에게 좀 더 자세한 자초지종을 듣게됐다.


본래는 당연히 해주는 업무 스콥은 아니고 별도 Success Fee를 청구해도 될 업무 영역이라고. 그러니 이런 일이 자주 있을 거라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고마웠다. 당혹스러웠던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어서. 적어도 알아주는 이가 있으니 말이다.




“경력직의 설움, RSVP가 뭔데?” 


첫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내가 자료를 잘 못 쓴 건지 이슈 자체가 기사감은 아닌 건지 기사 게재가 안 됐다.


배포한 지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팀장이 사내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르넷, 주요 매체 RSVP 진행하세요.’



RSVP가 뭘까. 불과 오전에만 해도 나는 신입이 아니라 경력직이니 이런 실수는 하면 안 된다고 한 바탕 싫은 소리를 들었는데, 이걸 물어봐도 될까나...?



(출처 : mbc 드라마 - 자체발광 오피스 中)


우선, 알겠다고 대답했다.


네이버와 구글에 물어봤지만 나오지 않는다. 조용한 사무실, 아직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웃음으로 얼 무어 부리며 물어볼 사람도 없다. PR 에이전시를 다니고 있는 대학 동기에게 카톡 메신저를 보냈다.


“선샤인, RSVP가 뭐야?”


친구는 기자에게 연락해 오늘 배포한 자료를 설명해주고 확인을 요청하는 작업이라 했다. 마치 인턴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럼, 그냥 이렇게 이야기해주면 되지  전문용어를 쓰는 걸까.


그렇게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RSVP를 시작했고 게재율은 조금 나아졌지만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서럽고 억울했다. 신입처럼 배워야 한다며 연차 깎아서 들어오게 할 때는 언제고 뭐 하나 물어보기도 민망하고 살얼음판을 걸어야 한다니. ‘난 내 밑으로 경력직이 들어오면 그러지 말아야지.’


또, 한번 얼마 뒤가 될지 모르는 미래를 다짐해보며 연신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 했다. 수화기 넘어 기자들의 짜증 섞인 반응이 예상됐지만 까라면 까는 거다.


전화 봇이 된 것처럼 상담원 코스프레를 한 2시간 했을까. 더 이상 전화 걸 매체가 없어, 뒤에 앉아있는 경력직 선배에게 난색을 표했다. 더 이상 할 도리가 없다는 나의 말에 그는 시크하게 루션을 던졌다.




“어쩔 수 없죠, 그냥 뿌리오로 전체 문자 한 번 더 보내 놔요”



뿌리오는 또 뭔가.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고 싶은데, 입사한 지 한 달 된 나에게 이들의 언어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암호이고 장애물이다. 겨우 네이버에 뿌리오를 검색해보고 아이디를 등록했을까, 법인카드로 서비스를 충전하고 문자를 보내려 하니 이제 6시.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언젠가는 10분이면 이 또한 해낼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며 힘없이 게재 현황 보고 메일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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