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첫날이다. 26살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입사한 교육 그룹에서 1년 반 동안의 공채 생활을 청산하고 PR 에이전시로 이직했다. 난 꽤 인정받은 공채 신입 사원이었다. 흔히 에이스들만 간다는 홍보팀에서 1년 여 정도 근무했고 신입 OJT 기간 과제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 내가 1년 반 만에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감정적이라면 감정적이고 현실적이라면 또 현실적이다.
#무너진 신화, 토사구팽
내가 몸담았던 홍보팀의 팀장은 300여 명이 넘는 이 그룹의 절대적 신화였다. 그저 그런 어학원 1개 시절부터 직장 생활을 시작해 어학원은 물론이거니와 공무원, 편입, 자격증 사업, 유학원 등 사업 분야를 넓혀가며 회사의 폭발적 성장을 견인한 일등공신.
그녀를 존경한 이유는 비단 고리짝 신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지시해야 할 내용과 협의해야 할 사안을 명확히 구분하는 능력.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단숨에 파악하는 그녀의 혜안은 7년 차 직장인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훌륭했다. 분명 그녀의 이러한 역량은 그룹을 함께 키워온 임원들로부터의 인정은 물론 부하 직원들의 효율적인 업무 추진도 가능케 했다.
그런 그녀가 버려졌다. 소문에 의하면 갖은 고비를 넘기고 출산한 그녀에게 제발 복귀해달라고 애원하며 대표가 조리원비까지 내줬다 건만. 사람 일은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출산 후 1년 반 만에 복귀했다. 300여 명이 넘는 그룹이었지만, 그녀는 회사의 첫 출산, 육아 휴직 케이스였다. 모두가 그녀이기에 가능하고, 그녀라서 복귀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녀의 복귀는 자연스러웠다. 복귀 전부터 사내 인트라넷에서는 어느 정도 업무를 지시 및 팔롭하고 있었고 그런 그녀가 회사로 출근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6개월 만에 사직서를 냈다. 자신이 뽑아 교육시킨 5년 아래 남자 팀장에게 역할을 빼앗긴 것도, 그녀를 이만큼 키웠던 회사 대표가 법적인 이유로 더 이상 그룹사의 뒷전으로 밀려난 것도, 이제 막 돌을 지난 아이가 단식 투쟁을 하며 하루 종일 울며 엄마를 찾는 것도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인사팀에게서 받은 ‘계약직 전환’ 제안이 그녀의 퇴사 의지에 불을 지폈다. 후배 남자 팀장이 총괄팀장으로 승진하며 눈에 보이는 자리싸움이 절정에 이르던 때였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개국공신으로 불리던 인사팀 팀장에게 불려 가 계약직 전환 제안을 받았다 한다. 아이 때문에 시간 맞춰 퇴근하고 주말 출근이 어렵다면 차라리 시간제로 일하는 계약직 형태는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제안이지 이제 그만 포기하라는 회사의 우아한 메시지를 그녀는 바로 알아 들고 떠났다.
그녀가 떠나는 날, 아이러니하게도 난 청첩장을 돌리고 있었다. 청첩장을 받은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미소 띤 얼굴로 내게 말했다.
"르넷, 미안. 결혼식은 못 갈 것 같아. 결혼 축하해. 내 복귀 오래 기다려줬는데 미안하네. 힘내고."
신화가 무너졌다. 그렇게 난 퇴사를 결심했다.
#녹슨 나사 말고 닳아빠진 나사가 될 수 있을까
결혼을 하고 나의 이직 준비는 더 공격적으로 시작됐다. 결혼 후, 받은 인센티브가 다른 동기들과는 비교도안 될 정도의 터무니없이 형편없는 금액인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아, 나도 이제 시작이구나.’ 애당초 회사의 절대 신화인 그녀도 비껴가지 못했던 차별을 나 같은 신입 나부랭이가 피해 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직접 겪는 불합리는 꽤나 가슴 먹먹했다.
얼마 후의 인사이동은 내가 새벽까지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룹 홍보팀에서 일반 교육팀으로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계기도 이유도 없었다. 내가 결혼을 했다는 것 말고는.
흔히들 사회생활을 시작한 선배들은 이야기했다. 조직이라는 큰 기계에 자신은 그저 부품이 된 것 같아 직장생활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매 달 입금되는 월급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취업 준비생의 입장에서는 한없이 부럽기만 했던 그들의 한탄이 직장생활 1년 반 만에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기는 했지만 공감은 되지 않았다. 이왕 부품이 될 거라면 한참을 쓰지 않아 녹슬어 쓰지 못하는 쪽보다는 닳고 닳아 쓰지 못하는 부품이 되고 싶다는 게 내 각오여서 인가보다.
기왕 이직을 할 거라면 이런 나의 바람과 각오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었으면 했다. 쉽게 말해 여자인 나도 능력과 의지만 있으면 눈치 안 보고 오래 일할 수 있는 회사를 찾고 싶었다. 아직 경력이 2년도 되지 않은 어정쩡한 커리어와 심지어 결혼한 유부녀라는 현실이 스스로를 움츠려 들게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즉 하루빨리 이직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 끝에 나는 두 가지 기준을 세웠다
1. 10년 뒤 나에게 남는 직무를 할 수 있는 곳
2. 여성 임원이 있고 인력이 수익구조로 연결되는 곳
조건을 기준으로 고민하던 중 ‘PR 에이전시’가 떠올랐다. PR 에이전시는 다른 기업의 CPR(Corporate Public Relations)를 비롯해 브랜드 MPR(Marketing Public Relations), 정부의 정책 PR, 캠페인 등을 기획 및 실행하는 회사다. 즉, 산업보다 직무 중심의 기업이니 오랜 시간 재직하면 직무 숙련도는 높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PR 에이전시는 팀 단위로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수행하는 만큼 인건비가 회사의 이윤으로 들어오게 되는 구조다. 또, 보통 여초인 경우가 많아 여성 8 남성 2의 성비라고 하니 타 업계보다 여성 임원의 비율도 높을 터다. 전공이 언론홍보학과였으니 주요 회사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2~3군데의 PR 에이전시에 지원했고 다행히 마음에 두었던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묵혀둔 정장을 꺼내 입고 면접 장소로 향했다. 달리는 택시 안, 팀 단톡 방에서 연차를 내고 온 나를 찾았다. 지칠 줄 모르고 울리는 알람이 면접에 대한 내 의지를 한껏 격양시킨 덕분일까, 난 상기된 얼굴로 면접장에 도착했다.
#짠내 폴폴 비긴 어게인
8월의 습기로 행여 땀이 찰까 서둘러 건물로 들어갔다. 인사팀 직원의 안내를 받아 노트북이 설치된 후미진 골방에 들어갔고 간단히 필기시험을 치렀다. 브리프 기획안과 영작 문제로 구성된 시험지에서 마지막 문제가 인상적이었다.
'PR 에이전시의 존재 이유를 쓰시오'
아니, 업계 석학이 고민해야 할 문제를 면접 보러 온 사람한테 쓰라니. 헉 소리가 나면서도 이 회사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질을 고민하는 회사라니 촌스러운 모양새가 나랑 잘 맞을 것 같았다. 필기시험을 마치고 대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개인 PT 및 면접 순서였다.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면접관들의 본격적인 질문공세가 시작됐다.
" 이전 회사는 왜 그만두려는 거죠?"
경력 면접자들의 단골 질문이라더니, 나도 이 질문을 받을 줄이야. 감정을 추스르고 애써 여유 있는 척 대답을 이어갔다.
“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서 이직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 어떤 불합리한 대우요?”
내 대답이 흥미가 돋는다는 듯 앞에 앉은 여자 면접관이 책상 쪽으로 몸을 바짝 당기며 되물었다.
“ 성과에 대한 보상이 불합리하다고 느꼈습니다. 예를 들면 타 동기 대비 수치로 설명될 수 있는 성과지표가 높은데도 제가 받는 보상은 더 낮은 수준인 점을 알게 됐습니다. 헌데, 상사나 임원 분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두 번째 예상 질문이 날아왔다.
" 결혼한 지 두 달 됐으면 아이 계획은 있어요?”
이 질문은 내가 청첩장을 돌릴 때부터 재직 중이던 회사의 총괄팀장, 팀장이 시시 때때 물어오던 질문인지라 기계적으로 답할 수 있었지만, 왠지 딱딱한 분위기를 깨고 싶었다.
“ 저희 시어머니도 안 물어보시는 것을.. 하하, 없습니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나의 임신 계획까지 처음 본 사람들에게 공유해야 한다니 다시 시작한 다는 건 짠내 폴폴 나는 일이다. 면접을 마치고 3일 후, 합격 통보를 받았다. 2주의 시간을 줄 테니 재직 중인 회사를 정리하고 오라는 요청을 들었을 때, 곤란한 마음과 함께 짜릿한 감정이 솟구쳤다. 어찌 됐든 타의 반으로 2주 안에 회사에 안녕을 고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된 셈 아닌가.
‘저 오라는 데가 있어서요, 빨리 좀 그만두면 안 될까요?’라고 콧대 높게 굴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땀내 폴폴 비긴 어게인
팀장에게 퇴사 보고를 했다. 하루 만에 총괄팀장, 인사팀장, 상무까지 세 번의 면담이 이어졌다. 줄이은 면담에서는 승진 제안과 연봉 인상으로 시작한 '당근'과 유부녀인 내 커리어를 걱정하는 '채찍'까지 다각적인 접근이 시도됐다.
안타까웠다. 정작 중요한 건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왜 퇴사를 결심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들은 직원의 감정, 문제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의 깔끔한 해결이 최우선 과제였고 이런 식의 접근은 항상 직원들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 이 회사는 이런 식으로 절대적 신화였던 그녀까지 잃었건만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단호하게 2주 내 퇴사를 요구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출근길 지하철 스크린 도어가 고장 났다는 안내에 이대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전 회사를 미워했었다. 새벽 3시 퇴근 후, 잠자던 중 상사의 전화를 받아야 했던 생활, 피드백이라는 이름하에 가해졌던 비난들을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감내했었다. 인정한다. 합리화하고 싶었다. 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 이 아픔을 다 감내하는 것이라고 자기 위안을 해댔다. 그래야 다음날 지하철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버티는 것과 견디는 건 다른데 미련하게 스스로를 좀먹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반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자신한다. 이것은 자기 위안이 아닌 팩트다. 말보다 서면을 중시하는 문화 덕에 빠른 보고서 작성법을 익혔고 보고서 한 장을 쓰면 피드백이랍시고 20개의 악플성 댓글을 다는 팀장들 덕분에 강한 멘탈을 얻었다. 그뿐인가, 내가 지금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게 되지 않았는가.
이직 첫날이다. 평소 8시까지 강남으로 가야 했건만 오늘은 9시까지 광화문으로 간다. 후암동에서 광화문까지는 30분 거리. 시간과 거리는 여유롭지만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다. 이직도, PR 에이전시도, 경력직도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낯설어서 일까.
8월의 출근길은 항상 땀이 찬다. 다만, 오늘 출근길 흐르는 이 땀이 여름의 더운 열기 때문인지 시작도 전에 긴장한 소심한 마음 때문 인지는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모른 척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