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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Oct 28. 2019

내가 82년생 김지영을 봐도 될까.

기어코 또다시 닥칠 그날에, 딱 한 마디만

오늘 오후 공원에 갔다. 딸아이의 2차 독감 접종을 마치고 진이 빠진 스스로를 달래고 싶었다. 유모차를 끌고 바람을 쐬다 문득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떠올랐다.


'지금 내 모습이 82년생 김지영에서 맘충 상팔자 소리 듣던 부분이랑 다를 바가 없네.'


괜히 위축되는 마음을 제쳐두고 유모차를 세웠다. 벤치에 앉아 아이에게는 떡뻥을 주고 나는 시원한 커피를 호로록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 오고 있었다. 아저씨도 할아버지도 아닌 그는 요즘 말로 할저씨쯤 되는 것 같았다. 차양이 쳐져있는 틈새로 아이를 발견했는지 가던 길을 멈추고는 나에게 물었다.


<출처 : 영화 '82년생 김지영' 예고편 中>



"딸이에요? 애엄마?"


나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아이가 참 이쁘다는 칭찬으로 말을 이어가더니 이윽고 불편한 말을 내뱉었다.


"깜찍하고 이쁘게 생겼네. 딸은 이쁘면 돼! 다 필요 없고 이쁘기만 하면 돼. 이쁘게만 커라."


그는 자신이 아들 하나 딸 하나를 키워봤다며 말을 이어갔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그러려니 넘기기가 힘들었다. 이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의 뉘앙스가 뉘앙스를 넘어 '여자는 남자만 잘 만나면 땡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모가 중요하다'는 속뜻이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유모차에 앉아 미소 짓고 있는 딸아이를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자리를 뜨긴 떠야 할 것 같은데 그냥 일어나자니 무례한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그리고 이 와중에 이쁘다고 해주었으니 칭찬에 대해 고맙다고는 하는 게 도리인 것 같았다. 쌀쌀맞게 대했다가는 저 지팡이로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겁이 나기도 했다.


불지도 않는 바람 핑계를 대며 유모차를 밀었다. 도망치듯 벤치에서 멀어져 가는 내 뒷모습에 그가 다시 응원하는 듯 소리쳤다.


"이쁘게 키워요"


꽃집에서 화분을 살 때, 들었던 소리 같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는데 괜히 눈물이 맺혔다. 독감 접종 주사를 맞고도 10초 정도밖에 울지 않는 씩씩한 딸아이가 나를 보며 웃음 지어서 일까.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한 나인데 뭐가 그리 좋다고 싱글 생글 웃고 있는 걸까.


나도 안다. 그는 아무 적의 없이 한 말이라는 것도 그저 일상 속 해프닝 같은 일이라는 것도 다 안다. 그래서 더 가슴이 무겁다. 일상 속 공기처럼 스며들어 있는 이 불편함에 내 아이도 끊임없이 노출되며 적응해버리게 되는 걸까. 나는 그 시간 동안 이 아이를 지켜줄 수 있을까. 방금처럼 무례하지 않고 좋은 사람인 척하려다 아이를 방치해버리면 어떡하지.


때마침 친구가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러 가자고 해서 예민해진 걸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영화 하나 보러 가는 것도 '일'인지라 누구 하나 같이 영화 보자고 하면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날을 잡지 못했다. 남편이 월말에 바빠서인 것도 있겠지만, 실은 망설여진 것 같다. 누군가의 비난은커녕 이름 모를 이들이 느낄 불편한 감정이 걱정돼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해오지 않은 내가 이 영화를 봐도 될까. 난 그럴 자격이 있을까.


사실 난 소설이 이렇게 이슈의 중심이 되기 전 읽었던 터라, 페미니 어쩌니 하는 고민은 하지 않았다. 읽고 나서는 그저 딱하고 답답하고 한숨이 날 뿐이었다. 먼저 읽은 친구가 왜 '발암 소설'이라고 했는지 얼추 알 것 같은 느낌이랄까. 공감이 안 되는 스스로에게 안도하고 아뿔싸 공감하게 되면 가슴이 무거워져 책장이 넘어가지 않던, 머리보다 마음이 힘들었던 책. 나에게 '82년생 김지영'은 그런 책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건 딸아이를 임신했을 때였다. 임신 중 내 회사생활에 대한 불만의 8할은 출퇴근길 지하철이었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기 위해 '임산부 배지'를 가방에 달고 다녀야 하는 것부터 노약자석에 앉아야 할 때면 누군가에게 한 소리 들을까 '배지'를 앞에 내놓고 있어야 하는 것까지. 더욱이 짜증이 났던 건 그런 치사한 꼴을 겪으면서도 자리에 앉아야 좀 살겠는 내 체력이었다.


임신 중 출퇴근길 나를 지켜준 배지 - 현실판 부적 같은 건가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임신한 이후에는 줄곧 출퇴근 유연제 덕에 아침 9시가 지난 한적한 지하철을 탔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워가 지난 시간에 지하철을 탔다. 헌데, 웬일로 사람이 붐볐고 갈까 말까 하다 결국 비어있는 노약자석에 앉았다. 만삭의 배에 임산부 배지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니 눈치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안일했던 걸까. 두 정거장이 지났을 즈음, 반대편 출입문으로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흔들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팡이를 휘적휘적하며 반대쪽 손을 들더니 손가락을 위아래로 까딱까딱. 일어나라는 거다.


나도 모르게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은 만삭의 임산부에게 왜 그러냐며 다그쳤지만 그 할아버지는 그 말이 안 들리는지 개념치 않는 건지 말없이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난 옆 자석에 멍하니 서있다가 한 정거장 뒤 급하게 뛰어내렸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그 할아버지에게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분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 왜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우는 거지. 사연 있는 여자처럼 지하철역 한복판에서 청승맞게 이게 뭐하는 짓인가. 그때도 괜히 뱃속의 아이에게 미안했더랬다.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엄마 때문에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출퇴근길을 함께 겪는 것이 미안했고 세상에 나와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벌써 그때부터 죄책감이 똬리를 틀었다.


1년 전 그때에서 난 한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때도 오늘도 눈물지었다. 뭐, 그때는 대성통곡하고 오늘은 찔끔 흘린 정도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한 마디도 못하고 도망쳤다. 언젠가 또다시 닥치고야 말 이런 상황에 나는 달라질 수 있을까.


울지 않고 한 마디, 그냥 딱 한 마디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말이 뭐가 좋을지는 이제라도 고민해봐야겠다.


(출처 : tvn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7 中) - 지금보니 영애씨는 사실 막돼먹은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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