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하면 수많은 위기와 기회가 찾아온다. 이 위기 혹은 기회는 직종, 연차, 직급에 상관없이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와 괴롭힌다.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도 힘든 우리 이건만, 위기가 될지 기회가 될지 모르는 선택들을 해내야 하다니. 가혹하기 짝이 없다.
짧은 직장 생활을 하며 느낀 건, 위기일지 기회일지는 어찌 됐든 판을 벌려야 알 수 있다는 거다. 결과가 두려워 시작하지 않는 사람을 꽤 많이 봤다.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1년 뒤에도 3년 뒤에도 비슷한 연봉을 받고 비슷한 대우를 받으며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한결같다는 건 연인 사이에서 좋은 말이었는데, 직장 생활에서는 그다지 긍정적인 말은 아닌 듯했다.
돌이켜보면 난 겁이 없었다. 아니, 사실 좀 약았던 것 같다. 직급이 없을 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상사가 던져주는 걸 일단 해봤다. 팀 혹은 회사에는 좋지 않은 결과가 올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어차피 책임은 내가 지지 않았다. 난 일개 사원 나부랭이니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 했건만, 사실상 내게 리스크는 별로 없는 게임. 이런 게임이라면 무조건 Go!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달콤했던 내 첫 성공과 미지근했던 내 첫 실패의 경험은 날 이렇게 호전적인 결론으로 이끌었다. 성공하면 기회로 실패하면 위기로 변해버릴 순간의 선택이라지만, 어찌 됐든 무언가 선택한다면 성장한다. 적어도 선택하지 않는 이들보다는 말이다.
약도 없는 대리병에 시름시름 앓던 때였다. 금요일 오후 4시 임에 감사하며, 힘찬 타이핑을 이어가던 찰나 팀장의 시선이 느껴진다. 팀장의 자리는 내 대각선 뒷자리다. 굳이 뒤를 돌아본 건 아니었지만 이제 발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알아맞출 정도의 3년 차 짬밥이니,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모른 척하던 일을 이어갔다. 5분 여가 흘렀을까. 팀장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하, 영어 PT를 해야 하는데.. 이걸 어쩐다. “
불길한 느낌이 내 등골을 파고들었다. 왜 혼잣말인 척 저 말을 나한테 하는 거지? 쿵쾅쿵쾅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지금 내 마음은 불안해서 떨리는 걸까, 아니면 혹시 기대감에 설레는 건가. 잡다한 생각에 키보드를 치던 손가락이 느려질 즈음, 팀장이 나를 불렀다.
“르넷, 이번에 우리 팀 A사 제안 들어가는 거 알죠? 그런데, 여기 임원이 외국인이라 영어 PT를 해야 하는데, 팀에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르넷 밖에 없네. 어떡하죠?”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라는 게 이런 건가.
(출처 :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 시즌2')
난 영어를 그냥 한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을 정도고, 그마저도 지금 맡고 있는 고객사의 회의는 미리 안건을 체크하고 할 말을 준비해서 진행한다. 네이티브도 아니고 외국에서 대학을 나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수준도 아니다. 그런 나에게 영어 PT를 해보라니? 그것도 내가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팀장에게 이것은 잘못된 선택임을 말해야 한다. 나도 양심은 있다.
“팀장님, 음… 저 영어 하는 거 보셨잖아요. 저 외국에서 오래 산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교환학생 다녀온 게 다예요. 그리고 전 영어 PT는커녕 PT도 아직 안 해봤는데 괜찮을까요.”
팀장는 평소 보기 어려운 너털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네, 괜찮아요. 할 사람이 없는데 그럼 어떡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팀장에게 다시 물었다.
“뭐, 하라고 하시면 지시사항이니까 하겠는데요. 그런데 저 때문에 떨어지면 어떡해요?”
나름의 초강수다. 팀장은 결과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뿐만 인가, 이 프로젝트는 현재 우리 회사에서 진행한 적이 없는 산업군 이기에 꼭 수주했으면 좋겠다는 프로젝트가 아니던가.
다시 한번 고민해라. 나름 만족스러운 받아치기였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팀장이 입을 열었다.
“될 거예요. 안 돼도 상관없고요. 신경 쓰지 마요.”
“......”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팀장에게 제안서를 전달받았고 주말 동안 회사로 출근해 첫 PT 연습을 강행했다. 도망치고 싶었던 영어 PT를 주말 출근도 불사하고 연습한 이유는 하나였다.
나에게 기회를 준 팀장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난 평사원이기에 제안 수주 여부가 인사평가에 반영되지 않는다. 하지만, 임원은 다르다. 제안 수주에 실패하면 인사평가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즉, 리스크를 안으면서 까지 팀장은 나에게 기회를 준 셈이다.
이제 나름 선배인 나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 안다. 본인에게 득이 아닌 실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후배의 트레이닝을 위해 기회를 준다는 건 그 후배에 대한 믿음과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다. 이번 영어 PT는 나에게 기회가 아닌 위기일 수도 있다.
생전 처음 하는 PT를 그것도 영어로 준비하기에 주말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밤새 스크립트를 쓰고 예상 질문 답변을 통째로 외운 덕분일까.
내 첫 PT는 성공했다. 오랜만에 차오르는 성취감은 무료하고 지난했던 대리병을 어느 정도 진정시켜줬다. 물론, 성취의 순간은 짧아서 ‘그건 꿈이 아니었을까’ 하고 금방 현실에 매여 버렸지만 이후 팀 내 영어 PT와 외국 고객사는 내가 항상 담당 인력으로 고려되었다.
특정 영역에서 우선 고려된다는 건 그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니 나는 나의 길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