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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Dec 09. 2019

리더는커녕, 선배도 처음이라서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우리는 믿고 기다렸을까.

어서와, 리더는 처음이지. 기록적인 폭염을 물리치고 나간 동료의 청첩장을 받는 식사자리에서 선물 받은 책이다. 내가 지금 회사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트레이닝시켜준 이전 상사가 건넨 책이었다. 


'르넷, 복직 한 두 달 남겨놓고 읽어봐요. 술술 넘어가는 책은 아닌데 그래도 읽으면 도움이 될 거예요.'

트렌디한 제목에 비해 딱딱한 표지, 그리고 각종 실험 결과를 인용한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나에게 권한 것 중 어느 하나 그냥 넘길만한 것은 없었기에 몸에 좋은 알약을 삼키듯 심호흡을 하고 책을 펼쳤다. 묵혀둔 만큼 괜한 긴장감도 함께 숙성됐었던 걸까. 책은 걱정보다 생각할 거리도 마음에 새겨두고 싶은 구절도 많았다. 다만, 언제나 좋은 책이 그렇듯 머릿속에 질문이 한아름 생겨 약간 혼란스럽기에 글을 쓰며 머릿속 혼돈을 잠재울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리더는커녕, 선배도 처음이라서요. 

처음 선배가 됐던 순간을 기억한다. 컨퍼런스콜이었지만 처음으로 PT를 해서 따온 고객사의 리테이너를 집행하며 선배 노릇을 했다. 난 경력직이었기에 들어올 때부터 선배였지만 본격적으로 선배 '역할'을 한 건 그 프로젝트가 처음이었다. 입사 후 1년 반 가량을 과장, 차장들과 함께 일해왔기에 난 그저 '해야 하는 일'을 수행하면 됐었고  '어떻게' 하면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끝낼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선배가 되고 나니 '어떻게(How)'는 물론이거니와 '무엇(what)’을 '왜(why)’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했다. 후배 한 명을 리드하며 일하는 것조차도 '설득'과 '협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맞닥뜨렸을 때, 난 극도로 초조했다.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내가 공부한 시험 범위가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된 느낌이랄까. 후배에게 일의 당위성을 말하고 공감 혹은 동의를 얻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까라면 까'라는 말도 한 번쯤 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배짱은 없었다. 나조차도 그런 식의 대접은 받은 적이 없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새 나는 피드백과 디렉션에 집착하고 있었다. '설득'과 '협의'를 하기에 그때의 난 내공이 부족했고 자칫 이런 내 밑천이 드러날까 전전긍긍 떨고 있었기에 조금은 그럴싸해 보이는 피드백과 디렉션에 목을 맸던 것 같다. 실제로 디렉션과 피드백을 주는 것이 선배로서 나의 롤이라 믿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는 걸 꽤나 많은 시행착오 끝에 깨달았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었지만, 누군가 나에게 '선배 역할'이라는 것에 대해 미리 고민하고 준비하게 해 주었다면, 조금은 수월한 '선배' 신고식을 치르지 않았을까. 




#좋은 선배와 좋은 부모의 공통점, '믿는다.' '기다린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선덕여왕'에는 이런 식의 대사가 나온다. 

"사람을 믿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더라."

선덕여왕이 조카인 '김춘추'에게 건네는 조언이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지만, 내 사람은 그럴 수 없다"라며 실수한 포졸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리는 미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팀원들을 믿는 건 리더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라고 책은 말한다. 일말의 의심 없이 동의한다. 

그런데, 그게 쉽나. 

스스로도 못 믿어서 자기 검열을 일삼고 금요일에 업무 요청을 해놓고 월요일에 회신을 기대하는 이들이랑 일하는 우리 건만. 


믿고 기다리는 건 왜 어려울까.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육아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좋은 부모란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거라고들 한다. 거의 모든 육아서적과 부모를 위한 콘텐츠에 적혀있다. 헌데, 겨우 1년여 남짓 부모 노릇을 하고 있는 나는 이게 참 쉽지 않더라. 아이가 아직 '아빠' '엄마'를 하지 못한다. 때가 되면 할 거라는 것도 아직 돌잡이 아이에게 괜한 기대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 아빠를 외친다. 


어차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기어코 해내게 하려는 속셈이다. 내 속으로 낳은 내 새끼도 이렇게 믿고 기다리기 힘든데, 회사에서 만난 동료들을 믿고 기다리는 게 가당키나 할지 가늠조차 어렵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믿고 기다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기도 하다. 육아도 직장생활도 돌이켜보면 그랬다. 아무리 내가 아이의 뒤집기를 도와주려 아이를 엎어놓아도 결국엔 아이 스스로 뒤집어야 앞으로 기어갈 수 있었고 후배 또한 수 번의 피드백이 오가고 기다리고 기다린 후에야 더 나은 자료를 들고 올 수 있었다. 다만, 좀 더 나은 선배이자 부모가 된다는 건 믿고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실패했을 때 실망스러운 표정 대신 미소와 함께 두 번째 기회를 줄 수 있는 여유를 키우는 것 정도가 최선이지 싶다.




#이쯤 되면 왕관을 써야 할까.


이제 선배로서의 역할이 조금 익숙해지던 때였다. 헌데, 이제 일의 의미와 당위는 물론이거니와 팀원을 리소스로서 바라보며 조직 차원에서 '관리'를 시작하라니. 원래 회사를 다닌다는 건 이렇게 끝없이 숙제가 부여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유난인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엘리자베스는 왕관을 쓸지 말지 고민할 수 없지만, 우리는 할 수 있으니까. 도망칠까)


그래서 책을 덮고 의문이 들었다. 이쯤 되면 왕관을 써야 할까. 아니, 리더는 왕관을 쓰는 자리가 맞긴 한 걸까. 리더가 꼭 되어야 하는 걸까. 뭐, 리더는 어쩔 수 없이 연차가 쌓이면서 텍스트 그대로의 리더(Leader)가 된다고 하지만 좋은 리더가 되어야 할까. 임원이 되기를 거절한다는 일본의 직장인들처럼 우리도 '안분지족'의 삶을 살아도 되지 않을까. 


며칠을 끙끙거리던 중,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정도로 내 고민을 정리했다. 왕관을 쓰는 건 내 의지로 되는 것은 아니나 어차피 쓸 것이라면 적어도

'아몰랑'의 태도로 일관하는 세기의 '폭군'은

'관계(Relationship)'에 취해 성과에 연연하지 못하는 '셀럽'은

'결과(Outcome)’에 매몰돼 그 안의 사람들을 톱니바퀴 취급하게 되는 '사이코패스'는 되기 싫으니까.   


경계하는 리더의 모습을 고민해본 것만으로도 이 책은 나에게 값어치를 다한 걸로 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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