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우리는 믿고 기다렸을까.
처음 선배가 됐던 순간을 기억한다. 컨퍼런스콜이었지만 처음으로 PT를 해서 따온 고객사의 리테이너를 집행하며 선배 노릇을 했다. 난 경력직이었기에 들어올 때부터 선배였지만 본격적으로 선배 '역할'을 한 건 그 프로젝트가 처음이었다. 입사 후 1년 반 가량을 과장, 차장들과 함께 일해왔기에 난 그저 '해야 하는 일'을 수행하면 됐었고 '어떻게' 하면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끝낼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선배가 되고 나니 '어떻게(How)'는 물론이거니와 '무엇(what)’을 '왜(why)’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했다. 후배 한 명을 리드하며 일하는 것조차도 '설득'과 '협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맞닥뜨렸을 때, 난 극도로 초조했다.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내가 공부한 시험 범위가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된 느낌이랄까. 후배에게 일의 당위성을 말하고 공감 혹은 동의를 얻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까라면 까'라는 말도 한 번쯤 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배짱은 없었다. 나조차도 그런 식의 대접은 받은 적이 없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새 나는 피드백과 디렉션에 집착하고 있었다. '설득'과 '협의'를 하기에 그때의 난 내공이 부족했고 자칫 이런 내 밑천이 드러날까 전전긍긍 떨고 있었기에 조금은 그럴싸해 보이는 피드백과 디렉션에 목을 맸던 것 같다. 실제로 디렉션과 피드백을 주는 것이 선배로서 나의 롤이라 믿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는 걸 꽤나 많은 시행착오 끝에 깨달았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었지만, 누군가 나에게 '선배 역할'이라는 것에 대해 미리 고민하고 준비하게 해 주었다면, 조금은 수월한 '선배' 신고식을 치르지 않았을까.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선덕여왕'에는 이런 식의 대사가 나온다.
"사람을 믿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더라."
선덕여왕이 조카인 '김춘추'에게 건네는 조언이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지만, 내 사람은 그럴 수 없다"라며 실수한 포졸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리는 미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팀원들을 믿는 건 리더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라고 책은 말한다. 일말의 의심 없이 동의한다.
그런데, 그게 쉽나.
스스로도 못 믿어서 자기 검열을 일삼고 금요일에 업무 요청을 해놓고 월요일에 회신을 기대하는 이들이랑 일하는 우리 건만.
믿고 기다리는 건 왜 어려울까.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육아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좋은 부모란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거라고들 한다. 거의 모든 육아서적과 부모를 위한 콘텐츠에 적혀있다. 헌데, 겨우 1년여 남짓 부모 노릇을 하고 있는 나는 이게 참 쉽지 않더라. 아이가 아직 '아빠' '엄마'를 하지 못한다. 때가 되면 할 거라는 것도 아직 돌잡이 아이에게 괜한 기대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 아빠를 외친다.
어차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기어코 해내게 하려는 속셈이다. 내 속으로 낳은 내 새끼도 이렇게 믿고 기다리기 힘든데, 회사에서 만난 동료들을 믿고 기다리는 게 가당키나 할지 가늠조차 어렵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믿고 기다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기도 하다. 육아도 직장생활도 돌이켜보면 그랬다. 아무리 내가 아이의 뒤집기를 도와주려 아이를 엎어놓아도 결국엔 아이 스스로 뒤집어야 앞으로 기어갈 수 있었고 후배 또한 수 번의 피드백이 오가고 기다리고 기다린 후에야 더 나은 자료를 들고 올 수 있었다. 다만, 좀 더 나은 선배이자 부모가 된다는 건 믿고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실패했을 때 실망스러운 표정 대신 미소와 함께 두 번째 기회를 줄 수 있는 여유를 키우는 것 정도가 최선이지 싶다.
이제 선배로서의 역할이 조금 익숙해지던 때였다. 헌데, 이제 일의 의미와 당위는 물론이거니와 팀원을 리소스로서 바라보며 조직 차원에서 '관리'를 시작하라니. 원래 회사를 다닌다는 건 이렇게 끝없이 숙제가 부여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유난인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책을 덮고 의문이 들었다. 이쯤 되면 왕관을 써야 할까. 아니, 리더는 왕관을 쓰는 자리가 맞긴 한 걸까. 리더가 꼭 되어야 하는 걸까. 뭐, 리더는 어쩔 수 없이 연차가 쌓이면서 텍스트 그대로의 리더(Leader)가 된다고 하지만 좋은 리더가 되어야 할까. 임원이 되기를 거절한다는 일본의 직장인들처럼 우리도 '안분지족'의 삶을 살아도 되지 않을까.
며칠을 끙끙거리던 중,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정도로 내 고민을 정리했다. 왕관을 쓰는 건 내 의지로 되는 것은 아니나 어차피 쓸 것이라면 적어도
'아몰랑'의 태도로 일관하는 세기의 '폭군'은
'관계(Relationship)'에 취해 성과에 연연하지 못하는 '셀럽'은
'결과(Outcome)’에 매몰돼 그 안의 사람들을 톱니바퀴 취급하게 되는 '사이코패스'는 되기 싫으니까.
경계하는 리더의 모습을 고민해본 것만으로도 이 책은 나에게 값어치를 다한 걸로 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