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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May 17. 2020

직장맘 데뷔 100일 결산, 난 혼자가 아니다.

한 번 울고 두 번 아프고 삼십 번 도망치고 싶었다.

복직하고 100일. 한 3년 된 것 같은데 3개월밖에 안됐다니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다. 전사 워크숍, 세일즈, 코로나 19, 재택근무, 제안 PT 등 정말 3개월에 다 겪은 일이 맞나 되돌아보게 된다.


물론, 모두가 힘든 시간이었기에 내가 힘들었다고 징징 되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시 시작'을 앞둔 100일 전의 나 같은 예비 복직자를 위해서다. 1년 3개월이라는 휴직기간은 생각보다 나를 많이 바꾸었고 난 그걸 복직 후 100일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흔히 주변에서는 복직하면 일 년은 울면서 회사 다닐 각오를 하라 했다. 아이를 두고 나온다는 죄책감, 아이와 떨어지는데서 오는 불안감을 비롯 직장생활서 이따금 찾아오는 현타의 삼박자가 눈물샘을 끊임없이 때린 다는 거였다.


복직 전, 난 다를 거라고 자신했다. 아이가 눈에 밟히긴 했지만 그래도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니, 그 정도 셈법은 아는 사회인이니 괜찮을 거라 믿었다. 결과는  번 울고 두 번 아프고 삼십 번 이직 사이트를 들어가 봤으니. 다르다면 다르고 같다면 같다. 


돌이켜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백일 정산기가 다시 시작하는 후배와 선배에게 각오를 다지거나 혹은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를.


#나이 서른셋에 직장 상사 앞에서 대성통곡하다.


때는 코로나가 절정에 이르던 올해 3월. 꽤나 터프한 신규 고객사와 합을 맞추다 보니 심적으로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담당하는 고객사도 많고 코로나로 혼란했던 터여서 일까,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다. 열도 나는 것 같았다. 체온부터 측정해야 할 것 같아 1층 데스크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십여 층을 내려가는 그 짧은 순간에 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면 어떡하지? 아이도 걸렸으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다들 재택 하는데 나와서는 이 모양 이 꼴이야?'


체온 측정 결과, 저체온..?!


웃프다가도 자리에 돌아오니 다시 숨 쉬기가 힘들었다. 내 현 상황에 대한 자각이 다시 물밀듯 밀려와서였을까. 4개의 고객사에 실무로 투입된 1개의 신규 고객사까지. 물론, 모두 리소스가 풀로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이거 이러다 내가 잘 못해서 문제가 터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에 연이어 한숨이 흘러나왔다. 결국 상사와 리소스에 대해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생각하고 상사에게 찾아갔는데, 아뿔싸.


눈물이 터져 나왔다.


상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황당했는데 상사는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결국 상사는 조용히 물 한잔을 건넸고 나는 끄윽 끄윽을 연신하다 오분은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내 증세와 걱정에 대해 이야기하니 상사는 격려와 함께 일단 조퇴하고 컨디션을 살필 것을 권했다. 그렇게 조퇴하는 택시 안,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직장에서 우는 여자, 내가 혐오하고 별종이라 생각했던 사람이건만 이게 뭐람. 오늘 운 건 아이 때문도 달라진 내 환경 때문도 아닌 그저 아직 이 정도 업무를 수행하기 버거운 내 역량 때문이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애써 창밖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 후, 답답한 가슴이 만성 소화불량으로 이어졌고 결국 한 이틀 정도 연차를 쓰기도 했다. 그렇게 몸이 아프게 되니 불현듯 주변의 소리에 귀가 펄럭이게 됐다.

 


# 이직 사이트만 삼십 번, 귀는 펄럭거려도 손과 마음이 무거워서, 그만.


'르넷, 이제 이직할 때 되지 않았어?'

'너 정도면 더 좋은 데 갈 수 있을 텐데 생각 없어?'

'너무 늦으면 연차 무거워져서 이직도 어려워.'


보통 복직하면 회사 적응을 응원하고 격려하건만 내 주변은 정직한 사실 주의자들이 많나 보다. 스스로 커리어에 대해 많이 질문하고 주변에 의견을 많이 묻는 편이니, 내 지인들은 나의 커리어에 관심을 가져준다. 감사한 일이다.


재직 중인 회사는 흔히 말하는 '아이 낳고 다니기 좋은 회사'에 속한다. 임원들 중 기혼 여성의 비율이 많기도 하고 회사 내 제도도 잘 갖추어져 있다. 다만, 어느 회사이던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 먹는 것인지라, 내가 그 혜택을 잘 누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복직하니 예전만 못하네'라는 소리가 나올까, '이래서 애엄마는 안돼'라는 불만을 들을까 겁이 나서였을까.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인 결과 몸과 마음이 빠르게 지쳐갔다. 몸과 마음이 불안정할 때는 주변의 목소리에 더 의지하고 귀 기울이게 된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출근길마다 이직 사이트를 들어가게 됐던 것이.


한 달여 정도 됐을까, 이직 사이트를 데일리 모니터링하던 나는 회사에 남기로 결심했다. 감사하게도 소개를 해준 지인도 관심을 보인 기업도 있었지만 지금 이대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이직은 도망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남편의 조언 덕분이었다.


남편은 말했다.


지금 이직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상관없다고. 그런데, 정확히 이직을 하려는 이유는 고민해보라고.

지금 내가 회사생활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건 실무와 매니징을 함께해서,

정확히 말하면 매니징을 시작해서 인 것 같은데.

문제는 그건 어딜 가도 겪게 될 문제라고.

회사를 다니겠다면, 일을 계속하겠다면, 그건 언젠가는 뿌려트려야 할 숙제인데.

그 이유 때문에 그 회사를 나오기는 좀 아까운 것 같다고.


결론은 지금의 이직은 도망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고, 도망쳐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말이었다. 듣고 보니 뭐 하나 틀린 말이 없어 괜히 더 어깃장을 부리고 싶은 마음을 다잡고 대화를 마쳤다. 온화하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정확하게 하는 그는 뼈 때리는 통찰로 나를 너무 작게 만들기도 하지만,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마음의 안정을 주곤 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맞는 말 투성인 그의 조언이 나를 이직 사이트에서 건져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회사 생활에 집중하고 있다. 비록 요즘도 경험해보지 못한 업무로 신입처럼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중심을 잡으려 노력 중이다. 직장맘이 된 지 4개월 여가 지나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오늘도 내 출근길을 열어준다.  




1. 나의 출근은 이제 나만의 것이 아니다. 웃으며 배웅해주는 아이와 반복되는 내 야근에도 힘을 주는 남편, 그리고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으로 챙겨주시는 양가 부모님들이 있기에 가능한 출근이다.


2. 내가 힘든 대부분의 이유는 사실상 '아이'나 '모성'이 아닌 업무의 고됨이라는 것. 감히 달라진 환경을 내 고충의 이유로 내세울 수는 없다. 그건 직장맘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 스스로를 가두는 꼴이다.


3.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많다. 아묻따 눈물을 터트린 나에게 위로를 건네는 상사들, 억울한 일을 메신저로 쏟아내면 함께 욕하며 내 자존감을 지켜주는 동료들. 더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후배들까지.


모두가 나의 출근길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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