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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Apr 26. 2020

'갑'이 되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해외 PR 에이전시를 선정하며 얻은 5가지 발견

고객사의 요청으로 외국 PR 대행사를 선정했다. 동남아시아에 진출해있는 자사의 현지 PR 업무를 기획 실행할 수 있는 적정한 업체를 선정해 달란 요청에 현지 에이전시를 직접 컨택하고 입찰을 운영했다.


항상 선택을 받던 입장에서 선택을 하는 입장이 되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선택을 하는 이들도 절차와 판단의 근거 그리도 인지상정을 고려하는 직장인이라는 점이다. 물론 고객사마다 프로젝트마다 중요시하는 가치는 다를 거다. 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는 해외 에이전시들의 제안을 받고 화상 피티 후 만장일치의 의견이 나오는 걸 보면 사람 보는 눈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제안서를 평가자 입장에서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짧은 인하우스 홍보팀 시절 홍보대행사 재선정을 위해 국내 굴지의 홍보대행사들에게 제안서를 받고 리뷰 했었다. 다만, 그때는 1년 차 주니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제안서를 써보지 않았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들의 노고와 열정이 느껴졌고 반면 몇몇의 안일함과 안쓰러움이 훤히 들여다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리해봤다. 고객사의 선택을 받는 제안서 작성 노하우. 한 때는 기자든 고객사든 주변 이해관계자들에게 선택을 받아야만 하는 직업이기에 이 일을 시작할 까 고민하기도 했었던 내가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격세지감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에이전시 생활과 이번 해외 에이전시 선정의 업무를 통해 느낀 바는 크게 다섯 가지다.

 


#1. 제안 요청자도 떨고 있다.


정작 RFP를 보내고 나니 걱정이 앞섰다.


처음으로 생긴 걱정은 아무도 참여를 안 하면 어떡하나 였다. 얼굴도 한 번 못 본 들어보지도 못했을 한국의 기업과 에이전시를 위해 제안에 흔쾌히 참여할지가 의문이었다. 역지사지로 우리도 해외의 못 들어본 기업이 에이전시를 통해 RFP를 보내온다면, 우리는 과연 제안에 응할 것인가.


선뜻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도 당연한 것 아닐까.


하지만, 다행히도 제안요청서를 보낸 12 개의 기업 중 열 개로부터 참여 의사를 확인받았고 두 번째 걱정이 찾아왔다. 스스로 작성한 제안요청서에 대한 의심이었다. 제안요청서에 제안이 필요한 내용을 담는다고는 했으나, 부족하거나 부적절한 정보로 요청한 것과는 딴판인 제안서를 받으면 어떡 하나에 대한 걱정이었다.


'내가 제대로 요청한 거 맞나, 이해가 안되면 어쩌지'


비록 5개 기업의 RFP를 레퍼런스 삼아 수정의 수정을 거듭해 보낸 제안요청서였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이런 나의 불안함은 대행사들로부터 RFP에 대한 질문을 회신받고 답변을 주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해소됐다. 대부분의 에이전시가 궁금해하는 사항이 비슷했고 질문 답변을 하는 과정에서 제안을 받는 이들과 우리가 동일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떨렸던 마음을 다잡고 드디어 제안 마감일, 에이전시들의 제안서가 하나둘씩 도착했다.




#2. 회신 오는 순서가 PT 결과 순위와 비슷했다.


제안요청서를 총 12군데 보냈다. 그중 10곳의  업체가 참여의사를 밝혀 질문 답변을 비롯 메일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재밌는 현상이 보였다.


메일 회신이 오는 에이전시 순서가 거의 같다는 거다. 적어도  꼴등은 정해져 있었달까. 한국인이라 그런지 모르겠으나 일단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어도 회신이 오면 안심이 되고 괜스레 신뢰가 쌓였다. 신기하게도 메일을 빨리 회신하고 적극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한 에이전시들은 PT 결과 상위 랭킹에 속해있었다. (비록 10개 대상 기업이긴 하지만 말이다.)


처음으로 외국 고객사와 일 할 때, 당시 차장이 그들은 유선연락이 한국처럼 쉽지 않으니 가능하면 메일 회신을 빠르게 하는 걸 권했다. 상대의 답변을 확인할 수 없다는 자체로 불안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일단은 시키니 했는데, 7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체감해보니 빠른 회신은 발신자에 대한 배려였다. 그리고 그 배려의 대가는 발신자의 신뢰였고 결과적으로 효과적인 업무 수행이 가능한 기본이기도 했다.  




#3. 너의 '우라까이'가 보여.


"이거 우라까이 한 제안서 같은데?"

"우라까이 정도가 심한 것 같아."


제안서를 심사하며 가장 많이 한 말 중에 하나다. 우라까이. 전문용어(?)로 기존 제안서를 적당히 변형해서 새로운 제안서처럼 만드는 걸 이야기한다. 제안서를 쓰는 사람으로서 나도 우라까이를 한다. 하지만, 템플릿을 가져온다거나 서식을 가져온다는 식이지 그 안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뿐만인가, 제안서 내용이 달라지다 보니 달라진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해서는 레이아웃과 형식이 바뀌는 것이 맞다. 하지만, 며칠 동안 이어지는 새벽 퇴근은 사람을 '대충'의 노예로 만들고 결국 우라까이와의 한 판 씨름을 하기도 한다. 해서, 난 제안서를 쓸 때 스스로와의 딱 한 가지 약속이 있는데, 그건.


'최소 한 장은 처음부터 새로운 장표를 만들자.'이다.


촉박한 데드라인에 마음이 급하고 연이은 야근에 마우스를 쥔 손목이 흔들려도 저 약속을 지금까지는 지켜내고 있다. 이런 나여서일까. 우라까이 정도가 높은 제안서는 그 형식과 편집이 아무리 수려해도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특히, 이번 제안 평가는 열 군데의 제안서를 검토하다 보니, 유독 몇몇 제안서가 '범용 제안서'처럼 느껴졌다. 제안서 안의 '고객사 이름'을 '르넷'으로 바꾸면 나를 위한 제안서로 곧장 바뀔 것 같달까. 물론 제안 업무의 스콥, 상황이 유사하면 이전 제안서를 활용하는 게 효율적이겠지만 그래도 제안을 받는 입장이 되니 달랐다. 


내가 미처 몰랐던 현지의 상황, 생각하지 못했던 이슈들을 건드려주는 것이 감사했고 기억에도 남았다. 특히 현지 미디어를 대상으로 우리 고객사에 대한 인지도와 선호도를 조사한 에이전시에는 눈이 갔다. 비록 10명 남짓한 규모이니 결과의 신뢰성도 직접 했는지 장표만 그렇게 쓴 건지 알 수 없지만 상관없다. 그런 식의 접근과 사고를 제시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플러스였달까. 결국 우리를 위한 제안서를 써준 기업이 우선 협상 대상자가 되었다.




#4. 너의 '피 땀 눈물'도 보여.


화상 회의로 PT를 듣던 중, 가장 안타까운 B 업체가 있었다. B업체는 제안 접근 방식과 제안서 작성 내용 모두 좋았다. 특히, 자사의 비즈니스를 분석하고 조사한 내용이 이 제안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문서작성 능력이었다. 화려한 이미지는커녕 도식화도 되어 있지 않은 문서 형식에 놀랐지만 그들은 이 제안요청서를 꽤나 정확히 이해하고 무척이나 공들여 관련 제안 아이디어를 도출했다. 이토록 꾸밈없는 제안서도 그들의 노력과 피 땀 눈물이 보이는 것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놓였다.


'고객사들도 우리의 제안서를 보고 우리의 노력과 과정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달까.

결과적으로 B 업체는 높은 점수를 얻지 못했다. 문서 작성 능력이 발을 잡았기 때문이다.


알맹이가 중요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10개의 제안서를 봐야 하지 않는가. 심지어 PT도 하루에 6개 업체를 진행하지 않는가. 옥석을 가리는 것이 우리의 임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기 쉽게 듣기 쉽게 이해하기 쉽게 전해지는 제안서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문서 능력이 떨어지는 에이전시와 일을 하면 실무자 입장에서 여러모로 피곤하다. 에이전시에서 오는 문서를 그대로 고객사에 보고할 수 없으니, 일이 두배로 늘어날 수 있는 거다. 엄청난 리스크 테이킹 아닌가.


예전에 누군가 제안서 비딩 자리에서 고객사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Please choose international agency, if you need good report. But, if you need good results, choose us.

(좋은 보고서가 필요하면 글로벌 에이전시를 고르시고, 좋은 결과가 필요하면 우리를 선택하십시오.)"


항상 외국계 1위 에이전시와 비딩 결승전에서 만나게 될 때 던지는 일종의 승부수 멘트랄까. 당시에는 되게 멋있다 느껴지는 멘트였건만, 막상 에이전시를 선정하는 중간 관리자 입장이 되다 보니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았겠거니 싶다. 결론은 제안서는 알맹이, 편집 능력, 발표 이 세 가지 중에 그 어떤 것도 가볍게 볼 수가 없다는 거다.




#5. 견적은 제안서의 신뢰다.


적은 업체 선정에 핵심이다. 제안서 출력할 때 드는 출력비용 아끼자고 복사집 견적 비교도 하는 마당에, 매 달 고정비용을 써야 하는 에이전시를 선정하는데 당연하다. 다만, 중간관리자인 나로서는 제안서를 쓸 때 견적 초안을 쓰고 실제 마진이 얼마가 남는지를 정리해 보고할 뿐 최종 결정은 상사가 하는 식이기에 내 관심 밖이었다.


상사가 내가 쓴 견적서를 보면 가끔 하는 말이 있다.

 

"이렇게 쓰면 견적 신뢰성이 없어요."


나는 세세하게 쓴다고 써서 가져간 견적 이건만, 상사 기준에는 탐탁지 않은 셈이다.


에이전시의 견적서는 크게 인건비와 외주비 그리고 수수료 정도로 나뉜다. 에이전시의 순수익은 인건비인데, 이 부분을 비롯 고객사가 보기에 합리적인 견적서를 쓰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시급처럼 공식화된 인건비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서비스는 제품과 달라 기능과 스펙 등을 토대로 가격 대비 서비스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해서 상세내역과 단건 기준의 단가를 기재한 견적서를 쓰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고객사가 그나마 서비스 견적을 비교하고 판단할 근거를 제시하기 위함이다.


무려 10개 업체의 견적을 받다 보니 고객사 입장에서 견적 비교가 얼마나 큰 일인지 깨달았다. 견적이 너무 높게 온 업체는(평균 금액의 2배 이상) 그 근거가 제안서에 어디 있을지 봐야 하고 견적이 너무 낮게 온 업체는 제안요청서 기준 누락된 게 없을지 다시 살펴본다.


뿐만인가. 단가 기준 비교는 물론이거니와 부가 제안의 견적 금액도 기준을 세우고 추가 비교해야 한다. (내 자산관리 포트폴리오를 이렇게 비교했으면 난 건물 한 채는 있을 지경이다.)


그런 와중에 견적서 파일을 보며 한숨을 내쉬게 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였다. 단가가 포함된 상세내역이 없는 경우와 견적서가 지나치게 긴 경우였다. 너무 간단해도 안되고 자세해도 안되다니, 견적서를 쓰는 사람에게는 가혹하지만 실제 그랬다. TMI와 맥락 없는 생략은 견적서의 신뢰를 떨어트린다.




마지막으로 깨달은 바가 있다. 탈락과 거절의 메일을 쓰는 게 이리도 힘들다는 것. 그들의 노고와 일품이 고스란히 가늠되어 거절 메일을 한 줄 한 줄 쓰는 것이 그리도 어렵더라. 어쩌면 장장 한 달 동안 에이전시를 선정하며 깨달은 가장 큰 발견은 나름 '갑'도 애환이 있다는 거였다. '을'의 일상을 보내며 겪게 될 '갑'의 쓴소리에 일말의 연민을 느낄 단서가 생긴 정도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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