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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Apr 06. 2020

열심히 하는 것도 능력입니다.

열심을 켜고 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실하지 않은 전공의가 어딨어?"

요즘 나의 최애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유연석 배우의 대사다. BGM이 두둥 깔리면서 전달되는 중요 대사도 극을 관통하는 명대사 같은 것도 아니었지만, 귀에 꽂혀 들었다. 그건 내가 이 회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쩌다 접한 상사의 명대사와 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의 내가 정립한 '열심(熱心)'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가 연상돼서 였을 거다.


 

(출처: tvN 목요 드라마 - 슬기로운 의사생활)


입사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외주 디자이너의 낮은 작업 퀄리티를 보고 당시의 부장이 남긴 한 마디는 내 회사 생활의 모토가 되었는데, 그 한 마디는.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한 거고, 잘해야지.'

당시 입사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처음 접하는 에이전시 생활에 적응하는 것만으로 고달팠던 나는 스스로의 업무 성과에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저런 맞는 말을 들으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달까. 항상 말하지 않는가, 아픈 건 맞는 말이라고.  6년이 지난 지금도 일잘러가 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며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으니 상황이 나아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돌이켜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열심히 하는 것도 능력이라는 것.


지금에 와서 열심히 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최근 발견한 내 착각 때문이다. 난 스스로 꽤나 열심히 일하는 팀원이라고 믿었다. 아니, 확신했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생각보다 열심히 일하지도 일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당혹스러운 나날에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이미 내 안의 열심은 탕진했고 열심 열매를 먹어서라도 다시 충전하고 싶다는 상상에까지 이르니 열심히 뭘지 궁금해졌다.


내 일과 성과에 열심은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열심히 한다는 건 뭘까.



#'관성의 법칙' - 열심도 권태도 마음대로 멈춰지지 않아요.


모범생에게는 공부 잘하는 습관이 있었다.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일잘러에게는 '열심'이 습관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왜 일잘러들이 '열심히 하는 건 기본'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열심은 마음의 모멘텀이 아닌 업무를 대하는 습관이기 때문이었다. 출근길 커피를 사들고 들어가는 습관처럼 회사 책상에 앉으면 발동하는 일종의 '모드'같다고나 할까.


보통의 직장생활도 그렇겠다만 에이전시 생활은 '열심 모드'인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 도제식으로 업무를 배워가는 에이전시 특성상 경험은 절대적인 무기가 되곤 한다. 그렇기에 에이전시에서 '경험'은 엄청난 무기이자 성장의 자양분이 되는데, 이 '경험'이라는 것은 개인이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개인의 적극성은 무엇에서 시작되는가. 바로,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인드에서 시작하는 것 아닌가.


재밌는 것은 일을 열심히 한 다는 것에는 '관성'이 있어서 열심히 하기 싫어도 열심히 하게 된다는 거다. 복직 전 만삭의 나에게  팀원들은 좀 덜 열심히 할 것을 권한 바 있다.


하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제대로 일하고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는 자기 검열에 괴로웠다고나 할까. 열심히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스스로에 어찌할 바를 못하고 몸과 마음이 위태로운 출퇴근을 거듭하던 중 깨달았다. 열심히 하는 마음도 마음이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마치 달려가던 사람이 관성 때문에 멈춰 서기 쉽지 않은 것처럼 일에 대한 태도도 그런 셈이었다.


재밌는 건 권태도 마음의 상태고 태도라서 한순간에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복직만 하면 예전처럼 날아다닐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일 년 동안 열심히 살았다고는 하지만 일을 한 건 아니었고 내 몸과 마음은 예전만큼 열심히 일하기 버거워했다. 열심히 하고 싶은데 열심히 못하겠는 말 그대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나를 옭아맸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질문이 7년 차인 나에게 가당키나 한지조차 의문인 상황에서 마음의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달까.


주변에서는 시간이 약이라 말해준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인가.


 


#총량의 법칙 - 티 내지 않을 뿐, 그녀는 이미 '열심히' 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열심히 하지 않는 것에 '환상'이 있었다. 전날 드라마를 보느라 시간 가는지 몰랐다면서 시험을 보면 나보다 점수가 더 높은 친구가 부럽다기보다, 어제 밤새 공부했는데도 이 점수를 받은 내가 안쓰러워진 식이랄까.


회사에 오니 이런 식의 자괴는 일상이 되었다. 입사한 지 반년쯤 됐을까, 분명 어제 퇴근 무렵 고객사가 오늘 오후까지 신제품 론칭 플랜을 달라고 했다고 징징거리던 동료였다. 그런데 오늘 오후 멀끔한 플랜을 들고는 회의에 나타났다. 심지어 아이디어가 없다며 과감히 퇴근길에 오르던 그녀 아닌가.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어젯밤에 집에 가서 일한 거예요? 어쩜 그렇게 플랜을 후딱 써요?"


눈이 동그래 묻는 나에게 동료는 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 어제 집 가면서 생각했어요. 집에 가는데 거의 두 시간 걸리다 보니... 그래도 지하철에서 쓸만한 아이디어가 나올 때가 더러 있더라고요."


동료가 너무 멋있었다. 내가 만난 열심히 일하는 게 당연한 세 번째 일 잘러였다. 나처럼 갖은 유난을 떨며 열심히 하는 게 아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왜 난 동료의 말을 듣고는 응답하라 1988에서 나온 '일만 시간의 법칙'이 떠오른 걸까.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 1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법칙. 그 총량이 다를 뿐, 각 업무와 경지에 따라 필요한 총량 또한 정해져 있는 건 아닐까. 예를 들어, 양질의 플랜을 쓰려면 고민해야 하는 시간은 최소 반나절이고 그 최소한의 시간은 꼭 사무실일 필요는 없는 거였다.


복직한 지 3개월이 지난 지금, 스스로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열심히 하는 건 기본이고 잘해야 하겠다만, 그게 돈 받고 일하는 프로이겠다만. 생각보다 그 '기본'이 컴퓨터를 켜고 끄는 것처럼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힘든 나날이다.


재택근무를 하게 된 코로나 19 탓을 해볼 수도, 아이가 생겼다는 워킹맘 한풀이를 시도해볼 수 있겠다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모두가 힘들고 누구나 쉽지 않은 세상 살이니까. 그냥 버튼을 눌러 켜고 끄듯 내 마음의 열심을 활성화시킬 수는 없겠다만,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차근차근 해내가다 보면 언젠가 일만 시간을 채우고 다시 '기본'은 해내는 노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자기 위안을 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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