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몇 주간 외국 에이전시와 컨퍼런스 콜 혹은 메일을 할 때면 Hi, 보다 많이 듣는 말이다. 한국의 코로나 19 사태가 날로 외신 보도되고 있으니 안 물어보는 게 이상할 지경이긴 하다.
인사치레도 한두 번이지 하루에도 몇 번 같은 말을 들으니스스로에게 되묻기 시작했다.
#우리, 괜찮은 걸까?
누구나 알듯 괜찮지 않다. 우리 팀만 해도 3월의 행사는 연기, 5월의 행사가 미지수다. 우리 팀뿐이겠는가. 호텔이나 여행, 브랜드 론칭 등의 행사를 앞둔 상황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고 일반 유통, 정부기관, B2B 전반의 업계가 허리띠를 졸라맨다. (물론, 코로나 특수를 누리고 있는 온라인 커머스와 홈쇼핑, 위생용품 업체는 논외다.)
비단 코로나 19가 전파력이 높은 바이러스 이기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각종 기업행사가 보류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실무적 입장에서는 다른 접근도 가능하다.
우선,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에 관심 기울일 여력이 없다. 마스크를 못 사서 발 구르고 학교의 개학이 또 미뤄질지, 동네 확진자 동선이 어디인지 등.. 지금의 우리들은 당장 소화해야 할 이슈들이 너무 많다.사람들이 다른 이야기에 귀 기울일 여력이 없다는 건 1차적 PR 결과물이 나올 신문 지면, SNS 버즈에 일상적 브랜드 이슈가 소비될 확률이 낮아진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적인 기업이 택하는 행위는 둘 중 하나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는 존버형과일단 묻고 더블로 가자는 타짜형이 있다. 에이전시 입장에서 문제가 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타짜형이다. 타짜형은 일단 코로나 사태가 잦아들 때까지 PR은 묻어두고 사태가 진정되면 그 후에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하자는 식인데, 이는 에이전시에 가혹한 처사가 될 수 있다.
이유는 1년 계약한 월세방을 방학 때만 잠깐 계약 해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집주인에게 '월세 방'이 자본인 것처럼 에이전시에게는 '인력'이 자본이다. 자산은 자본 플러스 부채라는 회계 1원칙에 근거했을 때, 자본은 운용하지 않으면 이윤 창출이 일어나지 않고 이는 부채로 이어진다. 즉, 고객사별로 인력을 할당해놨는데 아묻따(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슈가 가라앉을 때까지 계약을 중단한다면 인력 낭비가 발생한다. 이는 고스란히 에이전시가 떠안는 손실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뭐, 어차피 월급 받는 과장 나부랭이 라이프인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회사와 고객사는 우리가 노는 꼴을 볼 수 없으니까.
타짜형이 에이전시에 손실을 입히는 건 맞지만, 사실상 실무자 입장에서는 존버형도 고통받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재정적인 손실이 나지 않으니 그냥 감내할 만한 것이라고 위안할 여지가 있달까.
결국, 이제 다 코로나 때문이다.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
업무가 한 달간 휴지 된 고객사의 계약 변경합의서를 쓰던중, 고릿적 이메일을 발견했다.
메르스로 인한 기자간담회 연기와 그로 인한 업무 변경안에 대한 논의가 오 간 메일이었다. 장문의 글이 오간 메일을 보다 보니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앞으로 닥칠 일들을 설마 설마 하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래서 어림짐작으로 경험에 비추어 코로나 19가 회사에 남기고 갈 것들을 전망해보고자 한다.'전망'이라는 걸 한다는 게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하지 않던가. 매도 미리 맞는 게 나은 법이다.
보릿고개를 나기 위한 세일즈 시대의 도래
우선 계약이 중단됨에 따라 에이전시는 매출이 줄어든다. 매출이 줄어든다 하더라도, 인건비는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보릿고개가 찾아온 셈이다. 벌써 한 달을 넘어가고 있는 이 사태가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으니 마냥 계약 재개를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신규 세일즈 돌입. 이 시국에 누가 PR에 돈을 쓰겠냐고 하겠냐만은 찾아보면 또 있다. 특히, 정부 부처는 한 해에 집행해야 하는 예산이 정해져 있는 만큼 용역 공고가 올라오고 있는 상황. 결국, 세일즈에 착수하고 저마다 세일즈 수주 혹은 실패를 겪으며 재택근무 시대에 역행하며 야근을 꽃피우게 된다.
업무 과다의 서막 - 벌써 두려워지는 5월
세일즈를 수주하면 야근을 끝낼 수 있을까. 아니. 본격적인 업무 과다의 시작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땄으니 착수보고를 비롯해 리소스 조정, 업무 계획 등등을 세워야 한다. 그럼 그걸로 끝 아니냐고? 아니. 홀딩된 고객사의 업무는 언제든 수면위로 올라올 준비가 되어 있다.
특히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코로나 19가 잠잠해질 그 직후가 나는 벌써 두렵다. 계약을 중단했던 고객사들은 업무를 재개하려 들 테고, 새롭게 수주한 기업들은 기존의 업무를 계속 유지해야 할 거다. 그렇게 또 야근의 전성기는 찾아오는가.
인력부족의 아이러니
인력 충원이라는 극약처방도 있다. 하지만, 그 또한 말처럼 쉽지 않다. 코로나로 인해 매출이 감소하는 시점에 신규 채용을 하는 것도 에이전시에게 부담일뿐더러 채용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인력이 충원된다고 그것이 바로 일력, 즉 노동력이 보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이전시 일은 고객사의 니즈, 성향, 업무 히스토리를 토대로 매체, 외주사, 관계사 등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식이다. 관계를 조율하는 일은 어제 들어온 새로운 인력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국 신규 채용자가 그 프로젝트를 이해하고 제 역할을 할 수 있게끔 해야 하는데, 그때까지 또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이란 건 신규 인력이 아직 해내지 못하는 리소스를 기존의 사람이 메우며 드는 시간, 야근을 말한다.
결국, 이제 다 코로나 때문이다.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일까? 아니, 시스템.
'이제 다 코로나 때문이야'라고 떼쓰는 것 마냥 코로나를 탓해보지만, 정말 그럴까? 아니다. 본질은 이 재난 상황의 여파를 먹이사슬 하층의 노동력으로 이겨나가는 시스템이다. 심지어 그것을 당연시 그리고 어쩔 수 없었다는 인정에 기대 정당화해 온 업계 관례도 문제다.
만약 계약서에 " '을'의 권리보전을 위해 천재지변의 경우로 인한 긴급한 계약 중단 시, 00프로의 리테이너 비를 지급한다"는 항목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닥치고 세일즈 모드는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비딩 시, 제안 fee 혹은 리젝션 fee를 받아야 한다고 업계 선배들이 줄곧 이야기했지만 아직까지 먼 미래로 보이는 것은 우리 선배들의 노오오력이 부족했어서 일까.
상사보다는 선배가 되고 싶고 좋은 선배란 행동하는 선배라 믿는다. 지금 당장 야근 쳇바퀴에서 페이스 조절은커녕 바퀴에 떠밀려 가고 있는 내가 과연 무얼 할 수 있을지 가늠하다 두 눈을 꾸욱 감아본다. 아직은 좋은 선배가 될 수 없다. 행동할 방법도 힘도 여력도 없다. 다만 딱 하나, 다짐을 하자면 적어도 먹이사슬의 아래에 있는 에이전시가 지새고 있는 이 밤을 우리의 열정 따위로 포장하지 않겠다는 거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한 기업의 명운이 다른 기업에 영향을 줄 때는 적어도 각 기업의 근간을 흔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건 흔히 말하는 '갑'과 '을'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갑' 의 위태로움을 '을'의 이해와 희생으로 절충시키는 시스템은 이제 재고가 필요하다.
아프지 말고 모두 몸과 마음이 건강한 봄이 오기를. 존버는 우리가 하고 있으니 코로나는 이제 그만 존버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