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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Mar 11. 2020

코로나 19와 공리주의 TMI

멀리 하기엔 너무 가까운 당신

근을 앞둔 일요일 저녁, 남편의 휴대폰과 내 휴대폰이 동시에 진동했다.


이제는 무던해진 '안전 안내 문자'였다. 하루에 몇 백 명씩 확진자가 나오는 마당에 이제 안전문자는 알림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이번엔 문자를 보고 아차 싶었다. 그건 비단 생후 한 달 된 신생아가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너무나 직접적인 묘사로 생생하게 보이는 감염자들의 동선 안내 때문이었다. 문자의 안내에 따라 구청 사이트에서 제공하고 있는 동선 안내는 다음과 같았다.


00 구청 A번 확진자, 본래 **구 구민이나 딸아이의 출산차 지난 1월부터 처가인 00구 00동에서 실거주 중. 현재 00 두유 대리점을 운영 중으로 배 달지는 확인 중이며 자세한 동선은 다음과 같다.


00일 0시, ㅎㅎ의료원 방문

0시, ㅂㅂ 대리점 이동 (자차 이동)

.....

...

..


구청에서 올린 이 안내글을 보고 나는 먼저 'TMI도 이런 TMI가 없네' 싶다가도 '그래도 우리 동네와는 좀 떨어져 있네' 하며 안도했다.


내가 느낀 안도감 혹은 누군가의 경각심을 위해 구청은 저리도 한 가정의 가정사를 면밀히 공식적으로 까발렸나 보다. 모든 현상에는 '왜'를 고민해야 한다지만 감염의 피해자인 그들의 가정사를 비롯 직업, 나이, 가족에서의 역할이 공개되어야 했을지 의문이다.


동선 안내 문자는 잠재 감염자를 스스로 자가격리하도록 유도하고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공유하는 것이다. 그들 동선의 타당성과 배경을 판단할 권리는 애초 우리에게도 공권력에도 없는 거다.


이런 고민에 이르다 보니 '공리주의'라는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배웠던 해묵은 사상이 떠올랐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논리 체계.  당시에는 텍스트로 '벤담 공리주의'라고 외우고는 살면서 다시 떠올릴 일 없을 줄 알았건만.  


현실판 공리주의를 일상과 회사에서 겪다 보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약 3주 전, 연차를 쓰고 있는데 회사 단톡 창이 유난히 시끄러웠다. 울리는 휴대폰을 보니 "사무실 내 마스크를 써줄 것을 요청" 하는 내용과 그 배경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는 파티션 하나 없는 개방형 사무인데, 옆팀 직원의 배우자가 코로나 검사 중이라는 거다. 근데 그 직원과 우리팀 직원이 빈번하게 식사를 했다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 옆팀 직원의 사는 곳을 비롯 배우자의 직업, 배우자가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받게 된 배경까지 세세하게 공유됐다. 카더라가 아니라 옆팀 팀장님이 팀원 보호 차원에서 공식 메일을 보낸 거다.


다행히 옆팀 직원분과 그 가족은 검사 결과 음성이었고 우리 팀 직원분도 모두 이상증세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주 재택근무가 시작됐다. 더불어 최근 대구 경북 지역을 방문한 직원은 우선적으로 재택근무를 할 것을 주문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몇몇 직원들의 개인사(?)를 접하게 되었는데 스스로의 가치판단은 넣어두려 노력하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무지는 두려움이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으나 회사를 비롯 지금 코로나 19로 인해 행해지는 정보의 공유들이 과연 적정선인지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다수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개인의 정보가 활용되는 건 괜찮은 걸까? 다수의 안위를 위해 허용되는 정보의 깊이가 어느 정도 일지 지금 혹은 이 두려움이 지나간 이후에라도 한 번은 고민해봐야 한다. 우리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야 말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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